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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Aug 02. 2023

화보단 사랑으로 채울 날들

아빠, 근데 왜 화내?

아들이 최근 들어 내게 자주 하는 말인데, 정말로 화를 낸 거라면 못난 모습이 들켜서 창피할 테다. 화를 내보지도 못하고 덥석 덜미를 잡힌 형국이라 얼떨떨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분명한 표정으로 답한다. 아빠의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무서워졌다고. 약속한 규칙을 다시 상기해 주느라 다소 딱딱한 어투로 또박또박 말했지만,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다. 의도가 없었어도 상대가 언짢게 느꼈을 때가 참 곤란하다. 아니었다고 한들 전해진 불쾌는 사라지지 않는다. 설명과 설득이 무용한 상황에선 오해를 풀기 어렵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네가 그리 받아들였다면 다음엔 좀 더 부드럽게 말하겠다는 약속을 전하고 마무리할 뿐이다. 확실히 더 엄해지고 잔소리가 많아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고국 땅에서 즐겁게 지낼 땐 괜찮았는데.





아이의 짧은 방학을 틈타 인천으로 날아갔다. 표면상으론 공사다망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장인어른의 칠순 생신을 축하하고, 드디어 결정한 나의 퇴사를 처리하고, 기적처럼 이루어진 내 세 번째 책을 출간하려고 비행기를 탔다. 뭔가 있어 보이게 늘어놓았지만, 몇몇 날을 제외하곤 모두 놀고먹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인사동과 삼청동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먹고 마셨다. 오래된 전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5개의 궁궐과 청와대를 둘러봤다. 유일한 외각 여행지로 강릉을 골랐고 경포대와 오죽헌을 눈에 담았다. 아이의 첫 경험도 많았다. K리그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거대한 워터파크에서 하루를 살아봤고, 직업체험관에서 꿈을 체험했고, 출판사에 방문해서 책 선물을 한가득 받아왔고, 직접 고른 소나무 디자인 도장을 파왔다. 본인 또래와의 놀이도 가득했다. 사촌들과 태권도 캠프도 다녀왔고, 우리 부부 친구의 삼형제와 어린이집 친구들과 오랜 동물 친구들과도 신나게 놀았다. 


너무나도 꿈같은 시간을 보낸 탓인가, 여정이 마무리될수록 아들의 감정선이 점점 굵어졌다. 지난 한국 여행과는 다르게 아쉽고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돌아올 날이 되었을 땐 결국 가기 싫다는 말까지 해버렸다. 당사자가 직접 밝혔다시피 장소의 선호보다는 학교에 가지 않고 노는 시간이 끝나는 게 싫다는 의미였다. 기약된 일정을 마치고 현재의 우리 집에 와서도 섭섭병은 낫지 않았다. 줄곧 엄마 아빠와 끝없는 휴가를 보내길 원했다. 일상의 시작인 학교에 가야 하는 복귀 첫날, 꾀병인지 몸살인지 모를 느린 움직임으로 완벽히 지각했다. 그때부터 아들이 완전히 변했다. 시간을 거슬러 아기가 된 듯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이젠 많이 커버려서 애정 표현을 간청해도 대충 해 주는 척만 하던 녀석이 사라졌다. 틈만 나면 우리 부부의 품에 파고들었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엄마 아빠를 찾았다. 한동안 뜸하던 뽀뽀를 시키지 않아도 세례를 퍼부었다. 급격히 부모 바라기 모드로 돌변했다. 물론 사랑스러운 모습만이라면 문제가 될 건 아니었다. 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일상까지 범접하여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부모와 헤어지기 어려워서 학교를 기피했다. 스스로 잘하던 일에서도 어른을 찾았고 혼자 해내기를 거부했다. 같은 공간에 머물러도 더 가까이 보이는 곳에 딱 붙어있기를 바랐다. 겨우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가나 싶었는데 사사건건 아귀가 맞지 않아 흘러가지 않고 삐걱댔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린 납득이 어려운 답답함에 혼내는 상황을 자주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커진 아이는 눈물을 더 쉽게 많이 흘렸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서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적절한 순간, 가만히 아들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어려워하느냐고. 우리가 모르는 힘든 일이 학교에서 있느냐고. 먼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나오는 대답엔 의외로 가득했다. 요즘 들어 예전의 가족과 행복했던 추억이 자주 생각나는데, 지금도 계속 그러고 싶어서 그렇다고. 언젠가 나중엔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없을 거라면서. 정확히 죽음이라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미래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진한 기쁨이 너무 커서 오히려 두려움으로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영원히 이럴 수는 없다는 자각을 하면서. 덜컹거린 가슴을 붙잡고 아이의 내면을 바라보려 애썼다. 아무것도 모르고 큰 소리만 내던 반성쟁이 아빠는 정신을 차렸다.





속이 크고 있는 아들은 몸도 함께 아프다. "아빠, 안녕!"이라고 힘차게 인사하고 등교했지만 조퇴를 하고 일찍 돌아오는 날도 있었고, 도저히 학교에 갈 힘이 없어 아예 쉬는 날도 있었다. 무사히 교문에 도착해도 돌아서려는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종종 아파도 나이를 먹고 힘은 세져서 이제 혼자 가방을 메고 우산까지 쓰고 걸을 수 있다. 가던 길에 가볍게 몸을 돌려 내게 인사하는 여유도 부린다. 괜히 날 바라보며 본인만의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얼굴엔 여러 표정이 담겨있다. 비 오는 어느 날엔 한참 저 멀리 손짓하길래 비 맞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는 줄 알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무지개를 보라고 가리킨 거였다며. 가까이 있어도 아이의 신호를 여전히 잘 모르고 놓친다.


라떼를 꺼내는 건 상대의 지금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나 땐 이랬다며 너 땐 왜 그러냐는 식으로 몰아가는 꼼수다. 각자의 그때를 존중해야 하거늘 자신의 지금만 보는 못난이는 올챙이 적을 숨기고 산다. 내 아이의 현재처럼 나도 분명 가족의 빈자리를 떠올리며 슬퍼하던 시절이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하지 못해 꺼내서 느끼지 못하고 티 안 나게 지나갔을 뿐이다. 나의 때와 달라도 너의 때를 이해하는 게 부모로서 서 있는 내 몫이다. 딱딱하고 푸석한 아빠와 다르게 부드럽고 촉촉한 아들은 표현도 다르다. 따뜻한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더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선물한다. 아무리 봐도 나만 잘하면 더욱 좋아질 날들이 대놓고 정답을 말해준다.


커서도 아이와 마음을 나누고 싶다. 어느 순간 단절되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긴 싫다.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인생의 동반자로 이해받고 이해하고 싶다. 자식이 아기를 지나 소년으로 살아간다. 곧 청년을 거쳐 어른이 되고 말 테다. 건강한 관계를 쌓기 위한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우리가 더 잘하자고 아내와 다짐했다. 비록 처음 하는 맹세는 아니었지만. 어제 하루는 왜 화를 내느냐는 질문 없이 보냈다. 오랜만에 반성 없이 만족하며 잠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넘치는 날들로 채워가기를. 조금씩 채울 날이 줄어들고 있으니.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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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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