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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Jun 25. 2023

혼내는 어른을 용서하는 아이



처음이었다. 우리 부부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손님이 우리를 찾아온 건. 순전히 아들 친구의 가족이 먼 우리 집에 방문했다. 최초라는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터진 후 하늘길이 막혔던 몇 년 전부터 따져도 바다를 건너 날아온 첫 지인이었다. 온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은 꽤 많았지만, 세상을 뒤덮은 전염병으로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 된 지 오래였다. 올해 초 그들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익숙한 공항 이름이 적힌 항공권을 보내주며 5월 어느 날 도착한다고. 아들의 귀에 들어가자,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기다리던 그날은 생각보다 금세 다가왔다.


저녁에 도착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온 가족이 공항으로 출동했다. 누군가를 맞이하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지다 곧 익숙한 얼굴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어색하게 반가움을 표현하며 신기한 재회를 실감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3가족의 짧은 동거는 우리가 즐기던 호주로 가득 찼다. 아들과 두 친구는 곧 공동육아 어린이집 시절로 돌아가 어울렸다. 장소만 바뀌고 몸만 조금 커졌을 뿐 노는 건 비슷했다. 아무런 장난감 없이도 몸으로 셋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 놀았다. 한국 친구와 먼 호주에서 뛰노는 아들이 보기 좋았다. 여행의 길이는 마지막에 찾아오는 아쉬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끝나면 늘 부족하고 안타깝다. 그렇게 상상만 했던 일정이 툭 하고 끝나자,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앓아누웠다. 그것도 며칠씩이나.


아프고 나면 아이는 크곤 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아들은 여러 성장의 면모를 보였다. 해마다 찾아오는 마더스 데이에 실력을 발휘해서 캔버스에 멋진 꽃 그림을 그려 선물하더니, 곧 이은 엄마 생일엔 연달아 집중해서 다음 작품도 선사했다. 사랑하는 미술 수업에도 혼자서 씩씩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밖에 엄마나 아빠가 잘 기다리고 있나 중간에 나와서 확인하던 어린 아가는 이제 없다. 새벽에 글을 쓰는 내 방에도 '똑똑똑' 노크하고 들어온다. 기억으론 부탁한 적이 없어서, "와, 아들 매너 있네!"라고 놀라니, "원래 예의 바르게 행동했어!"라며 당당히 대답한다. 학교와 책에서 배운 지식도 마음껏 사용하며 살아간다. 생존에서 필요한 건 물이나 음식이 아닌 '의지'라며 부루마블 게임 중에 파산으로 포기하려는 엄마를 말렸다. 무서워하는 벌레에게 '위로, 아래로'라고 말하자 그대로 움직여서 마치 말이 잘 통하는 동생 같아서 좋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요즘엔 '처음'에 꽂혀서 모든 것의 기원을 묻는데, 최근엔 공부를 누가 맨 처음 누구에게 가르쳤냐는 심오한 질문을 남겼다. 대답은 모를 때 나오는 현명한 제안인 '같이 생각해 보자'로 우선 둘러 넘겼다. 





어떤 기막힌 성장보다도 지금 우리 아이를 사로잡는 건 축구다. 일주일 중 연습과 시합을 합쳐 4일이나 한다. 한 주는 7일이다. 학교 쉬는 시간마다 하는 놀이 축구까지 합치면 신도 쉬었다는 일요일을 빼곤 전부 다 축구를 하는 셈이다. 심지어 집에선 여가 시간에 축구 게임을 한다. 축구 수업에 데려다주는 왕복 1시간의 도로 위에선 가끔 내가 아이와 축구 유학을 온 건가 싶은 착각을 한다. 손흥민을 키워 낸 아버지는 대단한 게 맞는다며 이해하는 척까지 하게 된다. 오해는 말자. 아들은 축구선수가 꿈이지만 좋아서 하는 수준에서 즐기고 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긴장이 풀리려면 기다려 줘야 하는 성격은 그대로다. 그런데도 스스로 나서서 공을 차는 아이가 신기해서 자주 묻는다. 축구가 그렇게 좋냐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겐 할 말이 없다. 좋다는 데 덧붙일 말이 있으랴.


아이의 관심이 부모의 잔소리로 이어지는 나쁜 육아 사례가 우리 집에서 쏟아진다. 좋아하는 걸 더욱 잘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기준을 자꾸 밖에서 가져온다. 같이 하는 친구들보다 더, 아니 최소한 중간은 했으면 좋겠는데 왜 우리 아이는 잘 안될까 싶은 조바심에 휩싸인다. 아이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긴장을 걷어내면 본인의 실력을 모두 보여준다. 공도 걷어내고, 패스도 하고, 골도 넣고. 아쉽게도 욕심이 가득 찬 부모의 눈에는 부족한 면이 더 잘 보인다. 공을 피하지 말아라, 발만 쭉 내밀지 말아라, 더 세게 차도록 해라, 교체할 때 하이 파이브 제대로 해라. 우리의 잔소리에 주눅 든 아이를 발견하곤 정신을 차린다.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주목받아 서 있기도 어려운 자리에 자진해서 나가고 있는데. 건강만 하면 다행이고 감사라던 부모는 어디 가고 부족한 재능과 노력을 따지고 있다니. 아무 말 말고 칭찬만 해주자고 아내 파랑과 자주 다짐한다. 좋아하는 걸 하는 아이를 그저 희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자고.




생각대로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육아라면 어려움이 없을 테다. 분야를 바꿔 요즘 우리 집의 화제 '게임'으로 넘어가면 또 다른 예민함이 펼쳐진다. 미디어와 전자기기는 모든 부모의 골칫거리다. 언제부터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자식에게 허용할 것인가. 정답과 원칙과 추천이 각양각색으로 넘치지만, 집마다 알아서 중심을 잡고 이뤄가면 된다고 믿는다. 다만 가끔 그 중심에 주인공인 아이가 종종 빠져서 문제다. 게임을 하기 위해 나름의 규칙을 정해두지만 조금이라도 아이가 조절이 안 되면 기다리지 못하고 불안해진다. 저러다 게임에 중독되어 하루의 목표에서 삶의 목표가 돼버릴까 봐. 파랑의 말처럼 한 때 게임만 하면 살길 바랐던 학창 시절과 게임하는 시간만이 자유였던 직장 생활을 겪어온 내가 해봐서 그렇다. 통제가 불가능한 약점을 인정하고 아예 삶에서 게임을 빼낸 나로서는 아이의 불안한 줄다리기가 걱정된다. 게임과 함께 있는 아이를 보면 정신을 잃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다가 틈을 보이면 놓치지 않고 혼을 낸다.


야단의 처음은 일정 기간의 아날로그 시간으로 주어진다. 매력적인 복고풍의 단어는 결국 스크린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화려한 화면 없이도 잘 지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퍼즐, 카드, 체스, 보드, 그리고 마피아 게임까지 못 하는 게 없다. 한 편에 제쳐두었던 그림도 그리고, 만화책도 만들면서 잊고 살던 취미를 되살린다. 하지만 나 좋자고 영원히 차단을 강제할 순 없다. 자식에게 다시 원래의 자유를 허용하면 나도 모르게 감시자로 변한다. 알아서 잘할 것을 믿고 맡겨야겠지만, 자신을 못 믿는 부족한 어른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다. 적정한 선을 찾았다가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한 달은 대학원 첫 학기를 마무리하고 세 번째 책을 만드느라 과제와 원고에 둘러싸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시 주 양육자를 떠나 파랑에게 아들을 맡겼다. 마음은 바빴고 멀어진 아들에겐 미안했다. 방에 틀어박힌 아빠에게 종종 아들이 들어와 응원을 남겼다. 힘을 줄 거라며 아끼는 인형, 장난감, 메달을 곳곳에 전시해 줬다. 자신이 읽던 책 중에서 아빠가 고민하는 주제와 비슷하면 보여주며 도움이 될 거라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어느 날은 아들이 의외의 이야기를 하고 가는 바람에 문 닫고 나간 뒤 한참을 멍해 있었다. "아빠, 우리의 추억을 찾았어!" 몇 년 전에 가지고 놀던 검은 표범 블록을 들고 와서 신이 나게 외치는 게 아닌가. 요즘에 안 보인다고 가끔 이야기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곤 어디선가 찾아서 가져오며 반가워서 뛰어왔다. 


아무리 부모에게 혼이 나도 아이는 금방 용서한다고 한다. 우리 부모는 아이의 잘못을 용서한다고 착각하지만, 불완전하고 어리석으며 어설픈 초보 엄마 아빠를 순수한 아이야말로 몇 번이고 계속 봐준다. 해맑게 다가오는 아이를 보면 자주 잊는다. 엄청 대단한 내가 모자란 아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반대로 나의 모자람이 대단해지기 충분한 아이에게 물들지 않게 조심하는 게 옳다는 걸.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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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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