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아들에게 종종 묻는다. 요즘 어떠냐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안부 묻듯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을 한다. "사는 게 좋아!" 이보다 더 좋은 상태를 표현하는 말은 없을 테다. 살기 좋게 만든 데 한몫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하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캐물었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는 현재 생활의 행복을 늘어놓을 줄 알았지만 웬걸.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무조건 낫다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였다. 아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을 책에서 읽은 모양이다. 김이 좀 새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지내는 게 즐겁다는 뜻으로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자주 찾아오는 아이의 방학이면 꼭 여행을 간다. 너무 당연해지나 싶어서 미루거나 줄이려다가도 가족의 화목을 위해 떠난다. 집에서 계속 붙어있으면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기 쉬우니.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기분을 느끼는 여행자 신분은 상쾌하다. 아들이 좋아하는 '기분 내기'에 걸맞다. 가끔 기분 내고 싶다며 집에서도 예쁜 유리잔에 음료수를 담아 식탁을 차리는 친구다. 최근 방학엔 멀지 않은 곳으로 두 밤을 자고 왔다. 평소보다 짧은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여행 말미에야 알아챈 아들이 물었다. "왜 이렇게 짧게 온 거야? 한 5박은 하고 싶다!" 가계부를 들이대며 우리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알려줄까 하려다 참고 다음에 또 오자고 마무리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를 위해 좋아하는 근처 작은 놀이동산에서 아침부터 문 닫을 때까지 놀았다. 심지어 미니골프를 두 번이나 쳤다. 무려 18홀짜리를! 이 정도면 사는 게 즐거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사는 게 좋은 아들은 천재병에 걸렸다. 딱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유행한다던데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거는 식이다. "나는 천재! 엄청나! 최고야!" 그럼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 정도로 맞장구치면서 자신감 있는 건 좋은 거라 믿어 본다. 자신감 덕분인지 처음 겪는 다양한 배움의 과정을 척척 넘어선다. 나라 전체에서 보는 성취도 평가 시험 '나플란'을 무사히 치렀고, 학교에서 연습하던 연극에서 베스트 나레이터로 선정되어 최종 공연에 출연했다. 말도 안 꼬이고, 크게 말해서 뽑혔다는 후문이다. 선생님과의 첫 인터뷰에선 충분히 리더가 될 수 있는 아이라는 놀라운 칭찬을 듣고 왔다. 집에선 피아노를 배워가며 스케일과 하농을 오른손, 왼손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걸 보여주며 뽐낸다. 새로운 걸 알아가는 기쁨이 넘치는 눈빛과 몸짓을 발산하며. 좋아진 한국 노래도 줄줄이 외우며 천재성을 드러낸다. 이무진의 신호등과 과제곡을 수도 없이 부른다. 이런 천재가 예전엔 안 하던 실수를 하는 게 어색하다. 제 물건을 철저하게 챙기던 친구인데 요즘엔 모자, 옷, 책, 축구공 하나씩 놓고 다닌다. 모든 것에 천재일 순 없는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도 여기에 대해선 별말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만 잘하면 되는 건지 별로 개의치 않은 표정이다.
아이만의 세계가 점점 단단해지면 아이를 품고 있던 부모가 밀려나며 마찰이 일어난다. 자유롭게 키우고 싶던 소망은 어디 가고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속상하고 짜증이 난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제 마음대로 못 하도록 선택권을 주지 않는 억지도 부린다. 원하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서 나 편한 대로 유도해 끌고 가는 일도 허다하다. 갈등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서로의 고집이 센 아빠와 아들은 날 선 툭탁거림을 주고받는다. 자기가 싫어하는 장난을 치지 말라는 아들에게, 그럼 너도 아빠가 아쉬울 때 찾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유치함을 보인다. 두 남자가 도란도란 뾰족하게 찔러대면 가운데 몰린 아내 파랑은 곤란해한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서로의 말을 툭툭 끊고 들어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 말을 못 하고 끊겼다며 삐친다. 이게 뭔가 싶은 상황에 들어앉은 파랑은 누구 편도 들지 못한 채 멍해진다.
아이의 머리가 커지면 부부 사이도 조심스럽다. 평화롭고 안정이 넘치는 안전한 사이라면 좋겠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도 부딪힌다. 옛날엔 잘 몰라서, 지금은 잘 알아서. 안 좋은 컨디션을 핑계로 삐져나오는 짜증을 상대에게 내보이면서 걱정이 많다. 아들이 보고 배우지 않을지, 그리고 기분이 안 좋을 때 아이에게도 못되게 굴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럽게도 아이 앞에서 한바탕하고 나면 후회가 크다. 되돌릴 수 없는 장면을 심어준 죄책감에 지키지 못할 안 싸우겠다는 다짐만 반복한다. 한 번은 아들이 다른 집에 놀러 가기 직전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노는 내내 엄마, 아빠 걱정하며 보고 싶어 했다고. 다툰 부모가 마음에 걸려 제대로 놀지 못했단다. 화해한 걸 알고 나서야 마음을 풀었는데, 왜 싸운 건지 궁금해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다 치우면 거의 하나의 이유만 남는다. 누군가 잘못했는데 인정하지 않아서. 내 입장에서는 파랑이 그랬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니, 원래 그건 아빠가 자주 하는 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망갈 구멍은 좁다.
꽤 오래 아빠와 붙어있던 아들은 나의 변화에 민감하다. 부쩍 예전 같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옛날엔 무엇을 물어봐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었는데, 지금은 주로 본인에게 먼저 생각해 보라고 한다고. 아니면 기껏해야 '엄마가 잘 알려줄 거야'라고 돌려 대든지. 아기일 때는 작고 작아서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아이에게 지겨워하지 않고 수없이 같은 말도 반복해서 알려줬다. 커버린 아이에겐 정해진 만큼만 말해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떠올리거나 깨우치도록 기회를 준다. 거기서 차이를 느낀 아들은 덜 친절하다고 받아들였다. 함께 노는 시간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불만이다. 여전히 아이가 놀자고 하면 일단 같이 논다. 다만 요즘엔 10분 놀고 사라지고, 다시 부르면 10분 놀고 사라진다는 녀석의 증언이 사실이다. 대학원 생활이 만만치 않아서 틈틈이 뭐라도 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렇다. 언제나처럼 계속 붙어있고, 아기를 대하듯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길 바라는 건 아이의 오해가 아니다. 가장 좋았던 때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가 있을 뿐.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면 아빠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밀린 할 일과 공부가 남아있어도 온 가족이 함께 포근하게 자고 싶다는 요청에 모든 걸 접고 침대에서 뒹굴다 잠든다. 이곳엔 없는 어린이날도 그냥 넘어가려다 미안함에 챙긴다. 예정에 없던 선물과 외식을 선사하고, 원하는 대로 같이 놀다 늦게 자게 해준다. 푹 빠져있는 로블록스 베드워즈도 같이 하자고 해서 조인했다. 이런저런 잔소리와 명령을 옆에서 한껏 들으면서 팀원인지 하인인지 모를 역할을 수행한다. 게임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아들의 집중하는 모습을 즐기는 중이다. 아이가 놀아 줄 때 놀자며 정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커버린 몸이 여전히 귀엽지만 폭 안기던 그때가 아니라 확실히 덜 안아준다. 갑자기 거리감과 아쉬움이 느껴지면 더 다가가서 비비댄다. 아직 피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변하지 않는 건 없지만 사는 게 좋다는 아이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다. 덕분에 나도 살맛이 나니까. 계속해서 좋은 시간이 우리 사이에 남기를.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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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