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아빠 육아생존기] 5화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묘한 책을 발견했다. 한 방의 벽을 뒤덮고 있는 책들의 출처를 다 알진 못했다. 집에 들여놓았지만 어디에서 흘러 들어온 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그땐 나 혼자 살고 있지도 않았기에 더욱 헷갈렸다. 내가 사거나 빌려온 책이 아니라면 아내의 것일 확률이 높았다. 슬쩍 책을 들어 살펴보니 제목부터 저자의 이름과 얼굴까지 익숙했다. 그러나 바로 읽지 않고 다시 꽂아 두었다. 내 의지로 가져온 책이 아니어서도 있었지만, 그 당시 내 구미를 당기는 내용이 아니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 후 나와 아내 사이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격동의 1년을 보냈다. 허겁지겁 1년 전에 지나쳤던 그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헐레벌떡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후회했다. 왜 처음 마주했을 때 읽지 못했을까 하고. 흘려보낸 1년이라는 시간이 아쉬웠다. 도대체 어떤 책이었길래 이토록 날 안타깝게 만들었을까.
직장 생활 10년 동안 여러 여성 동료와 지내왔다. 그 안에서 만난 여성 직장인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성과 밀접하게 회사생활을 오래 해왔지만 불평등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비교적 남녀 차별이 없는 기업 문화를 가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약자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서 무관심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교과서에 배운 대로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될 수 없었기에 민감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이 정도면 문제없겠다고 대강 덮어두며 지냈다. 어지간한 부분을 완만하게 바라보면서 충분하다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유리한 쪽에 놓인 줄도 모르고 여성 직원에겐 어떠한 불편함도 없을 거라 여겼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는 직장 농담이 있다. 극한 직업 1순위는 다름 아닌 '워킹맘'이라는 웃픈 이야기. 왜 그들이 힘든지 모르던 철없는 시절엔 별생각을 다 했었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의 한결같은 보살핌이 익숙한 나에겐 회사에 나와 있는 워킹맘이 어색했다. 나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걱정했다. 다름 아닌 그들의 아이들이 집에 없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안쓰럽겠다는 동정. 지금 돌아보니 나도 뻔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공정한 시선을 보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못난 사람 중 하나로.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에 갇힌 채.
다행스럽게도 영원히 갇혀있진 않았다. 예상했던 과정이 예상치 못한 생각의 변화를 이끌었다. 바로 옆에서 싱글 여성 직장인이 워킹맘이 되는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느끼는 바가 생겼다. 아이를 키우며 회사에 다니는 아내가 겪는 불합리한 일을 자주 목격했다. 이성적인 곳이어야 할 회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를 외치는 순간이 늘어났다. 이젠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고 분노하던 중 문득 이 책이 떠올라 찾아서 읽었다. 나와 아내가 빠져있던 '일하는 엄마'가 처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먼저 고민한 저자의 귀중한 경험과 생각을 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일수록 뒤늦게 읽은 날 탓할 수밖에 없었다.
책에는 남자 직장인이라면 본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던 내용이 쏟아진다. 여성 직장인에게 벌어지는 난처한 상황에 관한 소중한 저자의 조언이 담겨있다.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바꿀 수 없고, 일단 인식하고 나면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난 정말 인식을 하지 못했다. 내 일이 아니었기에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아내가 헤쳐 나가는 어려움을 전해 들으며 그제야 알아챘다. 부끄러웠고 그래서 변하고 싶었다. 그동안 건성으로 신경 쓰지 않던 주변 여성 동료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바뀌어야 할 잘못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공평한 대우와 평가, 근거 없는 편견과 선입관이 곳곳에 뿌리 박혀 있었다.
워킹맘에게 보이던 삐딱한 시선도 바르게 되돌리려 애썼다. 어린 시절 언제나 전업주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던 환경에 자란 탓에 품었던 모자란 생각을 지웠다. 그러자 저자가 던지는 또 다른 말이 진실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일하겠다고 결정한들 자녀에게 피해가 돌아간다고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 부모가 함께 결정해서 나은 아이를 왜 한쪽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을까. 일하는 아버지가 육아에 전혀 동참하지 않으면 자녀가 피해를 본다는 반대 생각은 왜 해보지 못한 걸까. 항상 엄마가 중심이 되어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는 언제부터 자리 잡게 된 걸까. 반성하며 고치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 그들의 ‘일’은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또한 ‘가사, 육아’도 부부에게 똑같은 책임이 있다. 말로만 남녀평등을 외칠 게 아니다. 원해서 일하지 않는 엄마보다 어쩔 수 없이 일을 놓아야 하는 엄마가 많은 현실은 잘못된 게 맞다. 일하는 엄마에게 아이를 외면한다고 몰아대고 비난할 게 아니라 함께 키우지 않는 일하는 아빠에게 눈치를 줄 때다. 육아하며 일하는 '워킹대드'라는 말은 생소하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용어다. 워킹맘의 남편으로 살면서 부족한 자신과 사회를 깨달았다. 당연히 같이해야 하는 게 아닌 그저 돕는다는 소극적인 자세로는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치우친 지금을 바로잡기 위해선 더도 덜도 말고 절반의 내 몫을 인정하고 떠맡아야 한다. 모른 척 슬그머니 엄마에게 밀어두는 건 비겁하다.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글에도 열심히 '여성'을 넣어 표현했다. 대등한 관계라면 필요 없는 게 맞을 텐데. 아직은 올바른 상태와 먼 탓이다. 차이를 보여주고 사이를 갈라놓는 구분이 없어지면 좋겠다. 일하며 자식을 기르는 데 남녀 구별 없이 동참하는 광경이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좋은 책은 혼자 보고 싶어서 추천을 안 하는 괴팍한 습관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마음을 넓혀 본다. 내 안의 차별을 일깨워준 이 책을 더 많은 '남성'이 읽기를.
* 읽고 쓴 책 : <LEAN IN, 린인> 셰릴 샌드버그 지음
홍석준 작가의 [전업 아빠 육아 생존기]
"옛날에는 아빠도 육아를 함께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대."라며 마치 여성도 투표할 수 있게 해 달라 주장하던 옛사람처럼 잊히길 바란다. 내 바람이 지금 읽고 있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길 바라며 글을 보낸다.
아빠도 함께하는 육아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저자 홍석준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원고료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전액 기부합니다.)
네이버 연애 결혼 <썸랩>으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다. <썸랩>은 네이버와 문화일보의 합작 회사로 네이버의 '연애 결혼' 주제판을 운영했었고, 현재는 연애 결혼과 관련된 컨텐츠를 네이버 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에디터님께서 우연히 내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읽고 내용이 정말 좋아 연재를 부탁한다고 했다. 보내주신 칭찬을 괜히 덧붙이자면 '쉽게 읽히면서도 중심이 잡힌 글'이 참 좋다고 했다. 세상에 필요한 육아하는 아빠 이야기를 들려주며 꼭 같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제안에 감동했다. 이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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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