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Aug 05. 2024

학교를 오래 다니는 기분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를 데려다주던 서늘한 아침, 느닷없이 작은 입에서 오묘한 말이 툭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 말이야, 학교를 정말 오래 다니네?"


곧 손을 놓고 헤어질 시간을 아쉬워하면서도 반가워하려던 찰나에 의외의 감상을 듣곤 순간 멍해졌다. 학교를 가야 한다고 알려 주기만 했지, 언제까지 다녀야 한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들여다 보내는 것까지가 내 몫이라고 여겨서일 테다. 실제로 안에서 살아가는 건 아이의 몫이니. 깨달음에 도달한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냥 문득 오래된 기분이 들었다고.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챙겨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과의 반복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지겹거나 싫증이 난 말투는 아니었다. 묵묵히 걸어오던 길을 돌아보고는 잠시 움찔하는 정도랄까. 그간 내디뎌온 발걸음을 따져보면 그럴 만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간 아이는 자신의 첫 노트북이 생겼다. 몇십 년 전의 우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교육 환경의 변화에 새삼 놀란다. 학교 가기 전날 밤에 꼬박꼬박 충전하고, 안전히 보호해 줄 별도의 가방에 넣어 소중히 가지고 등교한다. 똑똑한 기계로 수업도 참여하고, 코딩도 배운다. 자신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도 혼자서 척척 만들어 해낸다. 컴퓨터에 푹 빠진 덕에 로봇을 조작하는 로보틱스 팀에 스스로 들어갔다. 학교 밖에서 열리는 대회를 위해 소중한 쉬는 시간도 반납하며 클럽 활동에 열심이다. 


기계와 떨어진 전통 학습에서도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매 텀(Term)의 마지막에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하는데, 이번엔 역사적 장면을 축소 모형으로 만드는 '디오라마'를 과제로 받았다. 구상부터 재료 수집, 디자인과 제작까지 대부분 혼자서 완성했다.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겐 즐거운 숙제였을 테다. 온몸을 움직이는 체육에도 눈부신 성장이 있었다. 우리로 치면 장거리 달리기인 크로스컨트리에서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중간중간 쉬어가며 겨우겨우 완주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번엔 거의 휴식 없이 꾸준한 속도로 달려서 결승선을 여유롭게 통과했다. 야리야리한 팔다리가 날아갈까 봐 애처롭게 바라보는 부모의 안쓰러움을 날려주는 건강한 활약에 감동하고 말았다. 





관계 속의 갈등과 해결도 겪으며 커 나갔다. 필수 준비물인 물병을 교실 한 곳에 모아둔다. 언젠가부터 한 친구가 아이의 물병 위에 자신의 물병을 일부러 올려놓았다. 옆에 두어도 될 공간이 넉넉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꼭 위에 얹어 놓아서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그러겠다는 대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아이의 성향으로 보았을 때, 아마 꽤 시간이 지나서 털어놓은 오래된 장난이었을 것이다. 마치 내가 짜증이 나는 것처럼 울컥하려다 별안간 떠오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다음 날부터 뚜껑이 평평하지 않은 물병으로 가져가 보자고.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뾰족한 주둥이 위에는 다른 걸 세울 수 없을 테니까.


순식간에 사건은 종결됐다. 아이의 물병은 자유를 찾았다. 다만, 또 다른 친구의 물병 뚜껑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타인의 속셈은 답답하기만 하다. 어떤 친구냐고 추가 정보를 물어보니 조금은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종종 우리 아이가 손을 들고 문제를 맞히거나 시험 성적이 좋으면 부정행위를 했다고 말을 덧붙인단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준(우리 아이)은 원래 잘한다며 편을 들어줘서 상황은 넘어간다고. 반에 한두 명씩 있는 질투심이 강한 친구로 보였다.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진. 얼마 뒤에 그 친구와 아이의 사이는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교실 내에서 소그룹을 계속 바꾸는데, 이번에 같은 그룹이 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면서 친해졌다고 전했다. 물병 사건으로 본체만체하며 껄끄러울 때와는 달리 이제 인사도 잘 나눈다면서. 


변화와 성장으로 꽉꽉 들어찬 한 학기를 보낸 아이에겐 걸맞은 보상이 찾아왔다.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노력을 보였다는 학교생활 보고서를 받았다. 물론 나란히 옆에 적힌 성적 등급도 있지만, 부모인 우리는 아이의 노력에만 집중하려고 애쓴다. 특히 그동안 도통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사회와 역사 과목에도 인정을 받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재미를 발견했다며 뿌듯해하는 아이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상쾌하게 맞이한 방학에는 일 년 만에 친척을 만나러 한국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3주가 채 되지 않는 일정은 먹거리와 만남으로 가득했다. 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질주했던 횟집을 시작으로, 소식가 우리 가족은 평소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적어 온 음식 목록을 초반에 대부분 클리어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헤매다가 들어간 한우구이 집은 아이의 최고 맛집으로 남아있다. 청국장이 어찌나 칼칼하고 담백하던지.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으면서, 오래 보지 못했던 그리운 얼굴을 하나씩 만났다. 훌쩍 커버린 사촌 누나와 동생들, 조금 더 나이 드신 양쪽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지냈다. 만나지 못하는 하늘에 계신 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오래된 인연인 어린이집 친구들, 새로운 인연인 호주의 지인도 다시 만났다. 한국은 우리에게 온통 정겨움을 선사했다. 


함께 즐기는 가족 공연을 두루두루 섭렵했으며, 섬으로 캠핑 느낌의 여행을 떠났다. 비록 숙소 안의 텐트였지만 즐기기 충분했다. 태어나 처음 해 본 갯벌 조개잡이 체험은 이번 여행 최고의 경험을 차지했다. 장난감 가게와 오락실도 원 없이 구경했고, 일 년 만의 축구 경기 직관에서는 역전승을 만끽할 수 있었다. 코인 노래방에 홀린 아이는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길 원했다. 영원할 것 같던 정해진 시간은 갑자기 뚝하고 멈췄다. 어떤 놀거리도 헤어짐의 아쉬움을 덮진 못했다. 다시 만날 게 분명한 얼굴을 뒤로하고 돌아서면서 각자의 슬픔이 흘렀다. 서로 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채 지금의 집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빠져나오며 아이는 놀라운 표정을 지은 채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2초밖에 안 된 것 같다."라고 황당해했다.





여행이 짧았다는 아쉬움도 잠시, 예상 밖의 충격이 찾아왔다. 입안이 아프다는 아이의 말을 단순히 피곤하다는 칭얼거림으로 치부했는데, 입을 벌려 속을 보니 난리였다. 한 개만 있어도 아프고 불편한 물집이 수십 개가 들어앉아 있었다. 어릴 적에도 한 번도 안 걸렸던 수족구병을 다 커서 앓았다. 예정되어 있던 축구 경기도, 로보틱스 대회도, 교회 예배도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회복을 했다가도 집안에 독감이 돌면서 한 명씩 쓰러지는 바람에 아이는 또다시 병치레를 했다. 뜨거운 여름을 보낸 덕분인지 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남쪽의 겨울에도 힘을 쓰지 못했다. 다행히 아이다운 회복력으로 어른보다 좀 더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학교에 갔다.


간만의 등교에 아빠가 도시락에 힘을 좀 주었다. 귀엽고 예쁘고 맛있는 점심을 싸줘서 고맙다는 칭찬이 듣기 좋았다. 중간에 가방이 없어졌던 대형 사건도 있었지만, 조금 울먹였을 뿐 결국 찾았다는 이야기도 유쾌하게 전했다. 유약한 아기로만 품었던 친구는 그곳에서 단단히 커가고 있었다. 학교로 돌아간 며칠 뒤엔 종이 한 장을 펄럭이며 특유의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근사한 소식을 전했다. 친구에게 모범이 되는 학생으로 뽑혀서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우리말로 하면 '예의범절 기르기'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롤모델로 활약한다고 알려줬다. 우리의 손을 떠난 아이는 학교에서 자신의 방향과 속도로 쑥쑥 자라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와 헤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걱정이 많아진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엔 다시 만나는 시간에 늦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였지만, 지금은 우리를 향한 염려가 들어있다. 늦어도 되니 천천히 조심히 오라면서, 절대 서두르다가 위험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아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고 관심을 기울이는 일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옳은 길로 걸어갈 것을 믿으면서.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텅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바로 만나보세요!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교보문고 https://bit.ly/3u91eg1 (해외 배송 가능)

예스24 https://bit.ly/3kBYZyT (해외 배송 가능)

알라딘 https://bit.ly/39w8xVt

인터파크 https://bit.ly/2XLYA3T

카톡 선물하기 https://bit.ly/2ZJLF3s (필요한 분이 떠올랐다면 바로 선물해 보세요!)

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이 만드는 꾸준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