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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빠보다 힘이 세지면

[홍석준의 아빠 육아 백서] Vol.06

by 초록Joon

학교를 마치고 나온 아이와 만나면 즐거운 하루 보냈냐는 인사 뒤에 꼭 따라붙는 주제가 있다. 바로 '점심 도시락'인데 말을 꺼내는 순서는 그날의 결과에 따라 다르다. 싹싹 비워 온 날이면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알려준다. 반대의 경우엔 물어볼 때까지 아들은 말을 아낀다. 워낙 야리야리하고 먹는 데 흥미가 없어서 싸준 도시락을 잘 먹고 오는 게 쉽지가 않다. 남겨 오는 날이 거듭되면 걱정과 안타까움이 결국 짜증과 억울함으로 변한다. 아침에 열심히 싸줬건만 거의 그대로 돌아오면 뒷목을 잡게 된다.


부모가 특히 예민한 부분은 어릴 적 자신의 기억과도 맞물린다는데, 나 역시 먹기엔 관심이 없었기에 도시락을 비우는 게 늘 일이었다. 눈치가 보이는 날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풀밭의 거름으로 준 적도 있다. 그때를 이렇게 돌려받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차갑게 식어 다시 마주하는 도시락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아무 데서나 작용하는 보상 심리 때문일 텐데 관대하지 못한 어른이라 내 노력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베테랑 아내에게 받은 조언이 있다. 남겨와서 속상한 마음만 아이에게 전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죄책감을 주지는 말라는 현명한 태도. 근데 이게 참 어렵다. 네가 남겨와서 나는 언짢다는 걸 전하면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너의 먹지 않고 돌아옴 때문이라는 건데 구분이 될까 싶다. 아들의 단골손님 같은 이유는 먹을 시간이 모자라서다. 최선을 다해서 먹는데 늘 시간이 없다고. 아이도 답답한지 친구들한테 물어봤다고 한다. 친구들은 시간이 부족해서 밥을 남겼다고 하면 안 혼난다고 했단다. 그러니 난 사정도 무시하고 무조건 밥 안 먹었다고 혼을 내는 아빠인 셈이다.




갑자기 밥과 운동이 좋아진 이유


그랬던 이 친구가 새 학년이 되자 밥을 쭉쭉 다 먹었다. 첫 주부터 5일 연속으로. 그 이후로도 타율이 매우 높다. 한 번은 식당에 가서 태어나 처음으로 더 시켜달라고 해서 더 먹기도 했다. 얘가 그 애가 맞는가 싶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벙벙해서 물어보니 대답은 간단했다. 키가 커지고 싶고 힘이 세지고 싶다고. 그러려면 혼자 생각해 보니 밥을 잘 먹고 우유 많이 마시고 운동하고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밥을 잘 먹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운동 마니아로 돌변했다. 틈만 나면 몸을 움직인다. 내가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따라 하고, 밖에서 뛰는 축구도 자주 하자고 한다. 저번엔 운동 마치고 같이 씻고 나서 시원하게 외쳤다. ‘이제야 아빠가 운동하고 씻는 개운한 기분을 알겠네!’ 하하.


육체를 단련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하교했다. 무슨 좋은 일 있냐며 물으니 반 친구들과 팔씨름해서 2등을 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밥 잘 먹고 운동한 건 모두 이를 위해서였다고. 아들은 반에서 키가 뒤에서 두 번째다. 팔씨름을 처음 했을 때 가장 작은 친구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지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해지겠다고 마음을 먹고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마치 무술영화의 주인공이 처절한 패배 후 지독한 단련을 통해 강해지는 스토리처럼.


괜히 나 어릴 적에 똑같은 처지가 떠올랐다. 체육 시간 씨름 실기 평가 때 나보다 유일하게 작은 친구에게 연거푸 패배했던 그때가. 비참한 마음은 비슷했지만 나는 잘 먹고 운동할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아들은 달랐다. 그 이후에도 먹고 운동하기를 멈추지 않더니 어느 날 활짝 웃으며 드디어 모두 이기고 1등을 했다고 했다. 네가 내 아이가 맞나 싶었다. 이 무슨 굉장한 의지란 말인가.




몸과 함께 달라지는 것들


몸이 자란 아들은 학교에서 혼자 해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가방도 메고 등교를 곧잘 한다. 아직 몸보다 커 보이는 가방이 불안불안하지만,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한 모양이다. 학교로 들어가는 길에도 여유롭게 중간중간 날 한 번씩 돌아보며 인사를 해주는 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고 든든하다.


매년 찾아오는 자기소개도 척척 해냈다. 자기를 보여주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골라 가서는 시원하게 설명하고 왔단다. 한 주에 한 명 뽑는 '이번 주의 학생'에도 당당히 뽑혔다.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칭찬해 주시는 선생님의 축하 카드와 함께. 선생님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답이 명쾌하다. '쉽게 알려줘서 좋고, 공부 시간에 조용하게 만들어줘서 좋아. 3번 떠든 친구는 교감 선생님께 보내거든.'


몸만큼이나 말도 늘었다. 아내가 아들에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걸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잘 듣던 아들이 완벽히 알아듣고는 한마디 했다. '아하, 그래서 아빠가 내가 놀 때 몇 분 안 되었는데도 두 시간 동안 놀았다고 하는 거구나!’ 나에 비해서 아들은 귀가 크다. 아내가 아들의 귀가 큰 덕분에 남 이야기를 잘 듣는다고 알려주었다. 이번에도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뒤, 깨달음을 던졌다. '아, 그래서 들어온 말도 잘 빠져나가는구나.' 맞다. 정답이다.


좋아하는 속담도 이리저리 응용도 곧잘 한다. 놀이터에서 오르던 정글짐이 점점 높아져서 더 이상 오를 자신이 없어지자, '휴, 이건 뜨거운 죽 먹긴데?' 식은 죽 먹기가 쉽다는 걸 뒤집은 표현이다. 키가 크는 중인지 예전만큼 아침에 벌떡벌떡 일어나질 못한다. 늦잠으로 비몽사몽 헤매던 어느 날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왜 엄마가 한번 널브러지면 일어나기 어려운지 이제야 알겠네.' 부모를 아이는 복사한다. 조심 또 조심.




역전이 자연스러운 거라지만


어느덧 키도 크고 힘도 세진 아이가 곁에 있다. 아들이 있으면 꼭 한다는 아빠와의 팔씨름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한다. 가끔은 방심 반 고의 반으로 지기도 하는데, 그때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낯설다. 난 언제고 한 번이라도 이런 열정을 가지고 전념한 적이 있던가. 녀석은 날 닮은 면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생각하고, 직접 해보고, 마침내 깨달아서 잘 찾아가면 좋겠다. 아이에게 바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꿈틀대며 살아간다. 아들 옆에서 답답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언젠가 장난기 없이 맞선 팔씨름에 완벽히 지는 날이 오고 말 테다. 그때가 빨리 오길 바라야 하는지, 늦게 오길 바라야 하는지 헷갈린다. 그저 오래도록 손을 맞잡는 가까움이 계속되면 좋겠는데.


함께하는 육아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저자 홍석준
* 원고료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전액 기부합니다.





어느 날 <한국교직원공제회>로부터 육아 칼럼 연재를 제안받았다. 예전에 <여성가족부>의 의뢰를 받아서 썼던 ‘모두가 함께하는 육아’ 시리즈의 글을 보고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쓰던 대로 육아를 주제로 자유롭게 작성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주 양육자 아빠로서 살아가면서 부모 모두 함께하는 육아를 지향하고 실천하고 있다. 내가 적는 글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길 바라며 연재를 시작했다. 부모와 아이가,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우리와 우리가 서로 더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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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https://bit.ly/3u91eg1

예스24 https://bit.ly/3kBYZ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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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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