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대신 흑자기업, 레버리지 대신 안정성 추구. IP,글로벌 확장은 덤
최근 소비재 영역의 투자를 보면 재밌는 흐름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투자 선호가 플랫폼 → 브랜드로 이동(혹은 확장)하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나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고 실제로 이것이 장기 트렌드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한번 정리를 해봤다.
지난해 말 F&B브랜드 GFFG가 300억원의 투자유치했고, 올 1월 말에는 그릭요거트 브랜드인 '그릭데이'를 운영하는 스위트바이오가 100억이 넘는 투자를 유치, 최근 헬리녹스가 400억원 가량의 투자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 외에도 수십억, 수억 단위의 브랜드 투자유치가 상당히 활발하다. 물론 브랜드 투자는 과거에도 자주 있어왔고 이미 영역도 다양했지만 분명 최근 들어 국내 중소형 브랜드가 유치하는 투자금액이 상당히 커졌고 또 활발해졌다. 오랜 시간 왜일까 생각해 봤고, 결론적으로 몇 가지 이유를 정리했다.
1) 플랫폼 성장의 과실
국내 패션, 뷰티, 식품 영역의 버티컬 커머스 플랫폼 시장은 이미 몇몇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종합 커머스 플랫폼인 쿠팡, 네이버, SSG, 11번가 등을 필두로 버티컬 플랫폼 영역에 패션 - 무신사, 뷰티 - 올리브영, 식품 - 마켓컬리처럼 대표 플랫폼들이 자리 잡았다. 남은 플랫폼 간의 경쟁은 계속해서 치열하게 이뤄지겠지만 적어도 신규 업체의 진입 장벽은 상당히 높아졌다. 플랫폼이 성장-성숙 단계에 진입하면 자연스럽게 상품구성이 첫 번째 경쟁력이 된다. 좋은 상품을 소싱해야 하고 좋은 브랜드를 찾아야 한다. 다른 곳에 없는 상품이면 더 좋다. 자연스럽게 브랜드에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 플랫폼들도 경쟁력 있는 상품을 소싱하기 위해 PB나 자체 브랜드 네트워크를 구축할 만큼 상품소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무신사가 PB인 무신사스탠다드를 키우면서도 무신사파트너스, 무신사스튜디오 등을 통해 투자-육성-판매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만큼 좋은 상품소싱이 최우선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 전 세계 유수의 OTT플랫폼들이 빠르게 성장, 경쟁하자 1차적으로는 글로벌 대형 제작사들에게,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글로벌 중소형 콘텐츠 제작사와 한국 제작사들에게 매우 큰 기회가 찾아왔다. 플랫폼이 성장하면 그에 필요한 상품소싱이 경쟁력이 되고 좋은 브랜드와 상품에 기회가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초기에는 유명하고 고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상품을 소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토리나 브랜딩, 컨셉 등 엣지가 강한 상품을 찾는다. 브랜드도 똑같다. 물론 콘텐츠가 국가 간 장벽 없이 이동에 자유롭다는 것은 상품과 다른 점이지만 최근 브랜드들도 조금씩 이런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이건 뒤에 4번에서 다시 이야기.
2) 시장 상황의 변화
금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든 투자사이클은 금리에 따라 달라지는데 모험자본 투자는 더욱 그렇다. 소위 커머스 플랫폼의 성장공식은 선투자를 통해 매출액, 즉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서비스를 고도화해 간 뒤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수수료를 올리든 광고를 붙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수익화한다. 다만 문제는 이 단계까지 가는데 상당한 시간과 자금이 투입된다는 점인데, 금리 인상으로 자본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과거처럼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며 여유롭게 기다려줄 수 있는 인심 좋은 투자사가 사라졌다. 당장 투자는 줄이고 이익을 내야 하는데 플랫폼에게는 이 선택이 쉽지가 않다. 성장을 포기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플랫폼 산업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수익성과 안정성이 보장된 산업으로 옮겨간다.
브랜드는 플랫폼 비즈니스와 달리 제조업 성격이다. 레버리지가 높진 않지만 원가에 마케팅비와 판관비, 마진을 붙여서 판매하고 정해진 마진만큼 이익이 된다. 가격에 시장성이 없다면 안 팔려서 망할 것이고 경쟁력이 있다면 대부분 수익이 난다. 브랜드 업체가 플랫폼처럼 수년씩 대규모 적자를 보고 있다면 경영상황 자체를 의심해야 될 만큼 적자가 용인되기 어려운 분야다. 장사 개념에 가까운데, 물론 승자독식 구조인 플랫폼처럼 업사이드가 높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작고 단단하게, 오래갈 수 있다. 가끔 글로벌 브랜드로 확장해 대박 나는 경우도 있으니 요즘 같은 시장상황에 투자자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3) 활발해진 SI투자
계속 투자 얘기다. 최근 CVC나 기업의 자기자본 투자가 활발하다. 이들을 전략적투자자, SI라고 부른다. 자본시장이 침체되며 금융자본인 재무적투자자(FI)의 투자 활동은 크게 위축된 반면 그동안 차곡차곡 현금을 쌓아둔 SI들은 저렴해진 가격에 좋은 브랜드를 투자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컨슈머 섹터 내 기업의 투자가 활발하다. 롯데, CJ, LF, 신세계, GS, 아모레 등 대기업들이 잇달아 CVC를 설립하고 스타트업 투자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타깃은 자사의 소비재 산업과 관련된 기업들, 당연히 신규 브랜드도 그 영역에 들어온다. 요즘에서야 VC들이 소비재 투자도 많이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들은 기술창업 영역인 딥테크와 IT, 바이오에 집중해 왔다. 반면 SI들은 협업 시너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유관 산업 투자를 선호한다. 브랜드 투자가 늘어나는 또 하나의 이유다.
4) 한 단계 높아진 확장성과 성장성 : 멀티 브랜드 전략, 브랜드의 IP화
소비재 영역은 내수시장의 한계가 명확하고 빠른 트렌드 변화로 인해 상품주기가 짧아 확장성과 성장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최근 이런 한계점들이 극복되고 있다. GFFG나 CNP같은 F&B영역의 브랜드 빌더들, 젠틀몬스터와 탬버린즈를 성공적으로 런칭한 아이아이컴바인드 등이 브랜드 빌더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하며 브랜드 빌더 모델은 이런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했다. 개인적으로 자주 언급했던 멀티IP, 멀티브랜드 전략이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브랜드들이 IP화되며 기존 영역이 아닌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고 콜라보하며 로열티 수취가 늘어나는 점 역시 수익성이 증대된 이유 중 하나다. 제조업 비즈니스가 아니라 IP비즈니스 매출이 발생하는 것이다. 브랜드 중에서도 이런 IP매출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또한 국내 브랜드의 브랜딩 역량 자체가 높아지며 해외로 수출되는 것은 물론 장기간 생존하는 브랜드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젠틀몬스터가 론칭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 브랜드는 여전히 트렌디하고 주목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다. 수년 내 이런 브랜드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 밖에도 D2C 강화나 온-오프라인 채널 운영과 같은 여러 마케팅 전략이 더해져 소비자 경험 측면에서 좋은 피드백을 받는 기업이 늘어나는 점 역시 브랜드 안정성과 성장성이 개선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