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까?

인간실격의 원인은 듣지 못해서 아닐까

by 카인말러

사람들을 만나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싶을 때가 있다. '특이하다', '이상하다' 선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타인의 행동이 나를 상처 주기 시작하면 그때는 난해함이 분노와 불관용으로 변한다. "저 사람 왜 저래?"라는 말에서 호기심은 싹 빠지고 그 사이 짜증이 스며든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아보기보다 피하기를 먼저 한다.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회사에 꼭 한 명씩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회식 자리를 여러 핑계를 둘러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피하는 게 습관이 되면서, 점차 나도 소외되고 내 주변 타인도 소외된다.

KakaoTalk_20200916_191534380.jpg?type=w773


오늘 다룰 책은 「인간 실격」이다. 요즘은 이런 제목으로 책을 내면 사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가장 고전적이고 한눈에 들어오는 제목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사서 읽었을 때는 공감이 많이 갈 줄 알았다. 그 당시에는 나도 사회에서 소외된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고 타인에게 상처도 쉽게 받았기 때문이다. 정작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 요조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요조라는 사람 안에 있는 두려움과 경멸, 짜증과 분노. 요조 스스로 자기가 왜 짜증이 나는지, 사람 만나는 일이 왜 두려운지 독자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공감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왜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까?

그 이유를 알면, 우리는 요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수많은 '나'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요조는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 무너졌다. 요조 스스로도 자신이 왜 힘든지, 무엇이 힘든지 글로 적었을 뿐 타인에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글도 나중에 정신 병원에 입원해서야 '마담'이라는 여자에게 전달했을 뿐 타인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왜 자기가 힘들다는 걸 주변인들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명망 높은 정치인이어서 말하기 어려웠던 걸까? 그래서 내가 힘들고 아프다고,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아서는 안 되었던 걸까? 그렇지만 요조는 성인이 되어 여러 여자를 만나고, 호리키라는 친구를 사귀지만 그저 술, 담배만을 같이 했다. 진솔한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분명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리라.


저 사람은 늘 저래.

저 사람은 말하는 게 이상해.

저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건가?


무엇이 됐든 그런 편견을 깨려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할 텐데, 정작 생각해보면 상대방도 나도 대화를 피했다. 그리고 「인간 실격」을 읽으며 문득 드는 생각은, 어쩌면 그 상대방도 아픔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것. 요조가 그랬듯이, 그 사람도 그저 마음이 여린 사람일 수 있다는 것.



눈꺼풀을 닫듯이 귀를 닫았다.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요조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을까? 나는 책을 다시 펼쳐, 앞쪽부터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 다자이 오사무 지음, 「인간 실격」, 25쪽


요조는 그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 없었다. 처세술을 밑바탕으로 한 타인의 논리가, 결국 나에게 부정적으로만 작용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퇴근 후에는 녹초가 된 채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주말은 혼자 있어도 모자랄 시간인데 밀린 잔업을 처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다시 월요일이 온다. (아마 세간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인 요조의 아버지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걸어 잠근다. 바쁜 현대인들, 그들이 악한 의도가 있어서 타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일이 끝난 후 피로가 타인과 멀어지게끔 만든다. 결국 직장에서는 활기차게 일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그런 모든 것들이 어쩌면 요조에게는 '처세술'로 보였을 수 있다.


모두들 요조를 직접 내치지는 않았지만, 그와 대화할 적극적 의지는 없었다. 방관, 무관심, 파편화된 개인, 뭐라고 이름 붙여도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파편화되어 있고, 각자의 '처세술' 속에서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닌 이상 피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요조는 타인과 진심 어린 대화 한 번 없이 자신을 걸어 잠갔다. 그 스스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요조만의 탓으로 볼 수 없다.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살기 어려운, 그래서 무관심이 만연한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요조는 그 누가 비겁한 논리로 자신을 짓밟아서 쓰러진 게 아니라, 그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러 찾아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졌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글쎄 듣고 보니 이건 묘하게 지쳐빠진 궁상맞은 여자로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빈부의 불화라는 것이 진부한 것 같아도 역시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지음, 「인간 실격」, 66쪽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갈망한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소외된 사람이 먹고 자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도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금방 잊는 것 같다. 그들에게 먹고 잘 환경만 만들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먹고 자기만 잘하면 사랑받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요조는 쓰네코라는 여자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얼마나 그에게는 충격이었는지, 그는 토하기도 하고 급기야 기절까지 한다. 쓰네코는 요조처럼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같은 슬픔을 가진 이 두 사람은 동반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지만, 결과적으로 쓰네코만 죽고 요조는 살아남게 된다. 자살 시도가 그에게만 실패라는 결과를 안겨준 것이다. 쓰네코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다행이나마 요조라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덕분에 요조는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됐기 때문에 그는 두 번째 사랑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요조의 이 두 번째 사랑이, 인간의 삶에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정부(情夫)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시즈코(그것이 그 여기자의 이름이었습니다.)가 신주쿠에 있는 잡지사에 일하러 가고 나면 저하고 시게코라고 하는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하고 둘이서 얌전하게 집을 지켰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면 시게코는 아파트 관리인의 방에서 놀았던 것 같습니다만, '눈치 빠른 아저씨'가 놀이 친구로 나타나서 무척 신이 난 것 같았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지음, 「인간 실격」, 87쪽


요조는 시즈코를 만나며 '만화 작가'에 관심을 가지며 처음으로 직업 다운 직업을 갖게 된다. 게다가 시즈코의 딸인 시게코에게도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주기 시작한다. 이전에 나는 자기 부모에게 따뜻한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사도세자가, 도리어 아들 정조에게만큼은 얼마나 따뜻한 아버지였는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조가 시게코를 보며 느낀 감정도 (사도세자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시기가 주인공 요조에게 있어 가장 애틋한 시기였을 것이다.


사람 산다는 게 먹고 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우정만으로도 온전해지지는 않는다.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사랑이 필요한데, 우리는 정작 사랑이라는 말은 빼놓고 사람의 삶을 본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은 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도리어 그걸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다자이 오사무, 아니 쓰시마 슈지를 읽다.


다자이 오사무의 본명은 쓰시마 슈지이다. 오사무의 삶은 주인공 요조와 상당히 닮아있어서, 사람들은 이 책이 오사무의 일종의 회고록이나 자서전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오사무도 요조처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여자와 엮이며 여자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총 5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마지막 시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제 사람들은 다자이 오사무를 읽는다. 「인간 실격」 외에도 「여학생」, 「직소」를 읽는다. 어쩌면 우리 독자들은 너무도 늦은 것 아닐까? 오사무는 살아 숨 쉬는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는데, 자신도 '인간'이라는 무리 안에 속하고 싶었는데, 죽은 뒤에야 우리가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 건 아닐지 걱정된다.


나도 자주 문을 걸어 잠근다. 강의나 과제가 많아 피곤한 날이면 저녁 먹고 나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방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본다. 또 친구가 힘들다고 카톡이 오면 '카톡이니까 이따가 확인해도 괜찮겠지' 하면서 폰을 덮어두기도 한다. 오늘 이 글은 나 자신의 반성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많은 '오사무' 앞에서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하고, 먼저 다가가 잘 지내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 사람 사이라는 건, 그 '사이'라는 공간이 꽤 멀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타인과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선뜻 먼저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게 내가 「인간 실격」에서 찾은 중요한 메시지다. 그리고 결국, 먼저 대화하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심장 한가운데 새겨놔야 한다.





세상은 먼저 다가가지 않음으로써 다자이 오사무라는 훌륭한 작가를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잃었다. 앞으로는 다가가는 내가 되자, 나 스스로와 약속한다.

이전 06화친절과 진실이라는 감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