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인말러 Feb 06. 2021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

Face Your Demons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저 말의 무게를 아는 것일까.


어릴 적 복도 한쪽 끝에 있는 우리 반에서 담임 선생님은 저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때는 저 말이 나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내가 영웅이고 내가 물리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당시 나는 MBC에서 방영하던 <주몽>이라던 드라마에 빠져 나 자신을 주몽과 자주 동일시했다. -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영웅 숭배기라고 했던가 - 


그러나,


그때 나는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라는 말에서 빛만을 보았고, 동전의 앞면만을 보았고, 행복하고 밝은 면밖에 볼 줄 몰랐다. 그 말 뒤에 숨겨진 공포는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바로 나에게 닥칠 위험과 악당을.


주인공이 있는 어떤 이야기든, 실제로 어떤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악역이 존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그 악역은 주인공 내면에 있을 수도 있고,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악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넌 반드시 악당을 마주하게 될 거야." 그게 네 내면이든, 아니면 너를 괴롭히고 있는 표면적인 악당이 있든, 넌 물리쳐야 해. 


그런데 문학이나 고전 설화, 서양 신화를 찾아보면 참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악당이 죽으면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이다.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는 참 감질나게 죽지를 않는다. 마지막 화인 7편에 가서야 그는 완전히 사라진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역할은 악당으로서 완성된다. 그래서 악당이 죽고 나면 주인공이 설 자리도 없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악당은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악당이 존재함으로써 사는 동안 우리 존재가 규명된다. 작년 초 나를 괴롭히던 악당은 '게으름'과 '허무주의'인 것 같다. 그걸 극복하고 나니 그때는 '오만'이라는 악당도 등장했었다. 지금도 내가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들이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철학자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말보다 행복을 잘 표현한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행복이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향해 가면 얻을 수 없지만, 다른 구체적인 것을 목적으로 할 때 마치 부산물처럼, 혹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찰나의 행복을 얻기 위해 술과 마약에 몸을 들이고 인생을 더 큰 고통으로 몰고 가는가. 행복이 인생의 목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목적은 각자의 악당에 맞서 싸워나가는 것이다.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저 말의 무게를 아는 것일까.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넌 반드시 악당을 마주하게 될 거야."

        

작가의 이전글 잘 들어주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