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작가의 모순수업을 읽고 삶과 앎을 고민하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도 상대적이라는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게 존재할까? 삶에도 진리가 있다면 그 법칙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 텐데...' 이 이야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그 친구가 대뜸 책을 한 권 추천했다. 바로 여기, 「모순 수업」이다.
이 책은 우리 삶에 가득한 '모순'에 대해 23가지 주제로 묶어 설명한다. 작가님의 직업이 학생과 함께 텍스트를 읽는 국어 강사여서인지, 이 책도 「선문선답」, 「벽암록」과 같은 불교 텍스트를 인용하며 그 속에서 모순의 의미를 찾고 있다. 굳이 '불교' 텍스트만 인용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대화문에서 분명 옛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오늘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2장(원문 26쪽), 9장(126쪽), 12장(172쪽)만 살펴보자.
우리가 어딘가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는 그 순간 움직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그곳에 정착한 셈이다. 작가는 생각에 뿌리가 생기는 것을 비판한다. 고정관념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사고, 색다른 탐구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 우리의 학술적인 활동을 방해한다는 점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렇지만 작가가 '뿌리'라고 말하는 것은 고정관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뿌리'는 수행에서 언고자 하는 깨달음의 실체 혹은 깨달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도달해야 하는 깨달음의 궁극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나 바탕 또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최인호 지음, 「모순수업」, 30쪽
작가는 '깨달음의 근본', 즉 중요한 지식, 기본이 되는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아마 현실에서 이것은 수학으로 치면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 물리학으로 치면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각 학문의 기본이 되는 지식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식은 '뿌리'보다 '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땅'이 있어야 우리는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다. 기본적인 지식 위로 새로운 지식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지식이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컨데 만유인력의 법칙만 맹신하다가 양자 역학을 이해하기 실패한 물리학자는 결코 좋은 물리학자가 아닐 것이다.
생각에 뿌리가 생기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 하지만 생각에 땅이 없으면, 애초에 내디딜 자리가 없다.
자신의 얕은 지식은 오히려 더 큰 진리의 길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깜깜한 밤을 ‘지촉의 불’을 들고 불안하게 걷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최인호 지음, 「모순수업」, 130쪽
내가 “맨큐의 경제학”이라는 책으로 경제학을 처음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교재에 믿기 어려운 내용의 설문 조사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 경제학 교수들의 절반 이상이 최저임금제의 폐지에 찬성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선만 다가오면 최저임금을 소폭 올리냐 대폭 올리냐 갑론을박하는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도리어 폐지 자체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해당 정책에 관한 본문을 읽었다. 이론적으로 최저임금제는 시장의 균형 가격(임금)보다 높은 법정 임금을 설정한다. 이로 인해 노동 시장은 공급 과잉, 즉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기업은 도리어 추가적인 고용을 하려 하지 않는, 실업 과잉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정보를 맹신했다. 문재인 정권 초기 최저 시급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내 얄팍한 몇 줄의 지식을 이용해 글을 썼고, 내 목소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커져만 갔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 그대로 나의 '얕은 지식'을 가지고 최저시급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떠들어댄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미시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후로 나는 최저임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최저임금의 공급과잉 효과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을 안 하셨다. 오히려, 드비어스(다이아몬드 독점 기업)의 사례처럼 한 기업이 생산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 최저시급이 사회적 후생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마치 내가 삼차원에 놓인 구를 보며 그것이 원이라고 말하는, 일종의 2차원 단세포 생물이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가 '지금' 하는 말들조차 얕은 지식에서 나오는 틀린 주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할 권리가 생길까?
나는 그 답이 내가 얼마만큼 지식을 갖췄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큼 지식을 갖췄냐는 정적인 상태다. 즉, 나에게 누군가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신 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사실 아무리 많이 공부한 뉴턴이라 한들 지금의 물리학 교수들보다 많은 지식을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뉴턴이 양자 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을 모른다고 해서 그가 현대 물리학자들보다 못한 교수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나는 "당신은 지금 많이 공부합니까?"라는 질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이 질문은 동적인 상태에 관한 질문이다. 신이 나에게 '진리'에 대한 청사진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내가 얼마나 많이 공부한 상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많이 공부하고 있고, 기존에 내가 배운 것들을 자주 의심해보고 있는지는 나 스스로 알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할 권리는, 그 생각을 자주 의심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왜 협산 선생은 파도라는 말로 불일을 괴롭힌 걸까? 산에 파도가 있다는 말은 그저 시적인 표현인 걸까? 아니면 모순적 표현을 이용해 어떤 위대한 철학을 알린 셈일까? 협산 선생은 마지막 행에 가서야 '파도'의 뜻을 말한다. 이 대화에서 파도는 '희롱의 대상', 즉 놀이의 대상인 것이다. 대학교 첫 학기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 났다. "놀아라. 대학 입시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놀아라."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 '놀아라'라는 말이 이렇게도 들린다. "공부를 했으면, 그 내용을 가지고도 놀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아마 나는 이것이 협산 선생이 불일에게 모진 방식으로 가르치려 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고, 토론하고, 때로는 깨달은 모든 지식을 무너뜨리며 반대 측면의 지식을 깨달아가는 것,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또 하나의 '놀이'가 아닐까?
삶에 대한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책을 다 읽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노는 것들에 대해서는 다시 고민해볼 수 있었다. 오히려 막상 생각해보니 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노는 것 외에 더 중요한 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이 정도면 내 삶에 대해서도 충분히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