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 하나의 문화 Jan 14. 2024

이사장직을 수락합니다

2024. 1. 06. 또 하나의 문화 이사장 이취임식

이사장직 수락의 변(김은실)


지금 조한혜정 이사장님께서 앞으로 등장하는 이사장에게 어떤 바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전 이사장님들 - 조형 선생님, 조은 선생님, 조한혜정 선생님- 이 이사장직을 맡고 수행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제가 느끼기에는, 이사장 역할을 그리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수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들에게 정말 어떠셨는지 사실 여쭤봐야겠지요? 제 인식 또한 일방적인 것이고, 개인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따르는 표현의 ‘세대적’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고, 이전 이사장님들과 제가 이사장이 되는 시대적 문화적 상황의 차이가 또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시점에는 이사장직을 수행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파악이 너무 어려워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어떤 힘이 부치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서 내가 또문 이사장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좀 힘들지 않을까, 나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좀 많이 했습니다. 사실 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싶다라는 생각 말이지요. 왜냐하면 뭔가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그런 세상인 것 같아서요. 그러나 또문은 항상 뭔가를 도모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저도 그래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이라 더 그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다른 조직의 이사장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조직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조직을 움직이는 또문 보다는 훨씬 큰 사무국과 여러 역할을 수행하는 위원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또문은 다 자발성에 의지해야 되고, 자발성은 그것을 갖게 만드는 동기와 맥락이 굉장히 중요한데, 또문을 움직이게 하는 자발성을 유발시킬 에너지가 저한테 있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 같은 게 사실 많았습니다.     


지금 또문은 일정 정도 휴지기인 부분도 있고, 그러나 죽지는 않는 곳이고, 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법적으로는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조직을 유지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는 또문을 운영해야 합니다. 이게 현재 또문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제가 이사장 역할과 관련하여 고민이 많았던 것은, 어떻게 보면, 제가 또문의 역사를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또문 초기부터 현재까지 또문에 관계된 너무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마음의 이미지가 홀로그램처럼 제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고민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대학원생으로 맨 처음 또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초기 선생님들이 ‘또문’ 같은 집단을 구상할 때, 선생님들의 제자로서 또문을 만드는 모임에 왔다 갔다 하면서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또문의 역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도 이제 정년 퇴임을 맞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의 맥락 속에서 당연히 기쁘고 기껍게 또문 이사장직을 수용하고, 열심히 하겠다는 말씀을 드려야 되는 것이 맞겠죠. 네,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해보겠습니다".     


제가 또문에서 또문의 언어를 배우고 동인들을 만났던 그 시절의 또문은, 사실 집단 체제로 운영이 됐었습니다. 제가 이사장이 되면서 그런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새롭게 또문의 집단 운영 체제를 이 시대에 맞게 한번 작동시켜보도록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조한 이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어제 조한 이사장님과 김희옥 이사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가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시작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또문에 사람들이 좀 모이는 것입니다. 조한 선생님은, 지금 이 시대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고, 또 단절되어 있고, 끼지 못한 사람들, 이전에 우리가 깍두기라고 말했던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들은 남의 공간에 침입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또 사실 함께 있어도 자기 자신을 어색해하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또문이 그런 ‘깍두기’들을 좀 올 수 있게 하는 장이 되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어젠다를 만드는 것보다는, 같이 갈 수 있다라는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올 수 있는 또문을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라고 제언하시더군요. 밥을 같이 먹든지 아니면, 영화를 보든지 이야기나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서의 또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셔서, 저도 중요한 일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래된 또문 동인들이 모이는 장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또 중요하게 간주되어야하는 것으로는 아카이빙 작업이 있습니다. 현재 또문은 40년이 됐고, 저 역시 또문의 40년 역사를 같이 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또문의 역사를 아카이빙하는 작업이 제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1980년대 이후에 한국의 여성 문화/지식정치 혹은 문화운동의 주요한 부분에 또문이 있었고, 또 또문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성 문화/지식의 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흔적들 그리고 삶의 의미들 그리고 또문 동인인 우리가 같이 만들었던 문화/지식장의 의미를 만드는 아카이브 작업을 하겠습니다. 그게 아마 또문의 아카이브 작업인 동시에 1980년대 이후에 여성문화 역사이기도 하고, 여성 지식 정치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문화/지식 정치에 관심이 있는 새로운 세대들, 여성 지식인들, 창작자들이 또문에 올 수 있는 포럼이나 월례회 등 다양한 방식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집단들과의 다양한 협력, 제휴, 연결 등을 해보는 방법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문이 세대를 횡단하며 여성들을 대화하게 하고, 연결하고, 새로운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모두 다 변화하는 주체가 되는 재미있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그들이 여기서 기꺼이 할 수 있는 소모임들, 소주제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그것들과 함께 사람들이 여전히 함께 따로 사는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는 말로 이사장직을 수락합니다.


2024. 1. 06. 

조한혜정선생님께서 또 하나의 문화를 시기별로 구분하신 것에 따르면, 앞으로 시작되는 5기를 이끌어갈 신임이사장으로 김은실선생님이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짝짝짝. 전임 이사장님들과 두 분 신구 이사장님께 감사와 축하를 보냅니다. (편집자)

작가의 이전글 사업이 아니라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