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글쓰기, 그리고 여성주의 지식

최수연(또 하나의 문화 동인, 한국학대학원 사회학과 교수)

by 또 하나의 문화

AI와 글쓰기, 그리고 여성주의 지식

최수연(또 하나의 문화 동인, 한국학대학원 사회학과 교수)




올해 1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양대학 논리적 글쓰기팀이 주최한 온라인 콜로키움 <ChatGPT 뒤에 숨은 학생들, 그 앞에 선 교수들>에 500명이 넘는 대학 교수, 강사, 학생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신청 인원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여 유튜브를 통해 중계하는 상황은 생성형 AI가 교육 현장에 일으키는 파장의 크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 역시 이 콜로키움에 참여하며 내가 겪고 있는 곤경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발제자들은 각기 다른 교육 환경과 철학을 바탕으로 AI를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 혹은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유용한 논점과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콜로키움을 통해 얻은 바가 많았지만, AI와 글쓰기의 관계, 특히 AI가 여성주의 지식 생산에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은 콜로키움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느끼는 혼란은 AI의 도구적 유용성을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그것이 어느 순간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로 전환될 때 마주한 당혹감의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


내가 처음 비용을 지불하며 AI를 쓰기 시작한 것은 1년 전, 미국의 한 대학교 여성학과에 소속되어 수업을 하고 논문을 쓰던 때였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수업을 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나의 말’이 아니라고 느끼는 날들이 많았다. 특히 내 생각들과 감정들을 영어 문장들로 간신히 붙들어 쓴 논문의 초고 위로 편집자의 빨간 줄 수정과 친절한 메모가 빼곡히 달려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우연히 AI를 통해 영어 문장 교열을 받아보았는데, 그 경험이 너무나 쾌적하게 남아 있다. 마감에 쫓기며 더 일찍 초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었고, 더불어 수정된 원고를 받아볼 때 심리적 타격도 크게 줄어들었다. 나의 원고를 읽고 수정하는 과정에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 교환 과정에서 무거워지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권력의 언어가 휘두르는 횡포로부터 나를 보호하는데 AI라는 도구는 매우 유용했고, 심지어 이를 위해 치러야 하는 가격도 너무나 저렴하다고 느꼈다. 아. 이것은 신세계구나.


AI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복잡해진 것은 내가 작년 9월부터 한국에 돌아와 수업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나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여성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그 학생들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유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한국어능력시험의 일정 수준 이상을 통과해 입학했지만, 한국어가 그들에게 외국어라는 것은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토론 과정에 참여하는 동시에 생각을 표현할 한국어 단어를 찾느라 발생하는 정적의 순간들, 흥분된 마음의 속도를 한국어 문장이 쫓아가지 못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발언들을 속에서, 나는 학생들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학생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기말 페이퍼를 제출한다는 사실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학생들의 기말 페이퍼를 읽으며,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존재가 지워진 문장들, 높은 수준의 추상적 개념어들, 일반론적 결론이 한국어로 매끄럽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AI와 대화하며” 기말 페이퍼를 썼다고 설명했다. 그 ‘대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 걸까? 생각과 생각의 순환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을까, 혹은 요청과 답변이 단방향으로 이어지는 절차였을까. 나는 그 학생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떠올린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이것은 위험한 신세계구나.


학생들이 AI를 글쓰기의 도구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로 여긴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나의 고민은 학생들의 기말 페이퍼 채점을 넘어 여성학 수업 자체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확장되었다. 여성주의 지식은 그간 보편적 진리,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의 지식 체계와, 그 지식을 생산해 온 제도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발전해 왔다. 여성주의자들은 기존의 서구 과학이 주창해 온 가치중립성의 허구를 지적하며, 구체적인 몸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글쓰기와 지식 생산을 주창해 왔다. <또문소식 1월>에서 조한 선생님이 소개한 또문 동인들의 ‘작게 쓰기’ 실험도 이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위치에서 이 몸으로 이만큼만 말한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너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문장의 여운이 유독 길게 남는 것은, 그것이 AI와 글쓰기에 대한 내 우려가 향하는 지점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AI의 젠더 편향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AI가 산출하는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서사들은 여성주의 인식론이 강조하는 지식의 구체성과 부분성과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요청에 응답하는 AI의 답변들이 글의 초고가 될 때, 글을 (쥐어짜며) 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만이 아니라 관점의 변화와 연대의 가능성 자체도 함께 차단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우려를 바탕으로, 나는 다음 학기 강의계획서에 AI의 선별적 사용 방침을 명시해 두기로 했다. AI 사용은 허용하되, 글의 초고는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글쓰기 전 자료를 검색하거나, 혹은 글을 쓴 후 문장을 다듬고 피드백을 받는 방식의 활용은 허용하되, 사용 방식에 대한 짧은 설명을 글과 함께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방침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다음 학기가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별적 사용과 전면적 사용의 구분이 실제 글쓰기 과정에서 구분 가능할지, 혹은 구분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원칙을 지켜낼 수 있을지, 솔직히 예측하기 어렵다. 글쓰기는 늘 괴롭고, 그와 대조적으로 AI를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편리하다는 조건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 한 ‘선별적 사용’이라는 개입이 충분히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 수업 정책이 우리가 지금 위험한 신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험과 실패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다. 이 위험한 신세계 안에서 함께 길을 찾기 위해. (2026. 3.)



아래는 서울과기대 교양대학 콜로키엄 주최측(서울과기대 논리적 글쓰기 팀)에서 공유한 자료입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서울과기대 교양대학 논리적 글쓰기 콜로키엄 「ChatGPT 뒤에 숨은 학생들, 그 앞에 선 교수들」에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분 발제자와 오백여명 참가자분들의 깊이 있는 문제 제기와 열띤 토론은 이번 자리를 의미 있게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지금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당일 녹화본을 아래 링크로 공유드립니다. 복기용으로 쓰셔도 좋고, 같은 입장의 교수자들에게 공유를 하거나 교육용 자료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발제자분들께서 토론내용을 편집한 나머지 발표내용에 대해 공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자막을 달아 공유합니다.


안서현 교수 발제 https://youtu.be/wfMynVd-XGQ?si=xQoXPyZzkZh0Y60Q&t=344

노연숙 교수 발제 https://youtu.be/wfMynVd-XGQ?si=fx2vVkK5QiKmafkk&t=2626

박숙자 교수 발제 https://youtu.be/wfMynVd-XGQ?si=o1KfvPy_1Ow2NvLd&t=4266

이은수 교수 발제 https://youtu.be/wfMynVd-XGQ?si=prNTZ8ikYeW6HJ0q&t=6511


처음부터 전체 https://youtu.be/wfMynVd-XGQ?si=eWoi1xRzfdcZ88M0&t=3


현장에서 다 나누지 못했던 생각들을 다시 곱씹어 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생성형 AI 시대의 교육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계속 만들어 가겠습니다.


서울과기대 논리적 글쓰기 팀(주임교수: 최형섭 /초빙교수: 김민수, 오승현, 오영진, 이성근, 전세진) 드림


>> 참고

언론 보도

AI가 쓰고 휴머나이저가 다듬고 교수는 의심하는 고리 끊어야/ 임효진 기자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724

“요즘, 수업 어떻게 하세요?” 900명이 몰렸다 / 임효진 기자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723

대학은 찾고, 학생은 피하고 ‘AI 글 숨바꼭질’…“평가 기준 바꾸자” / 이우연 기자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240861.html


참가자 개별리뷰

폭력교실 2026 , 새 학기를 맞이하는 교수자들께 / 오영진

https://www.webzineriks.or.kr/post/2026년-폭력교실-새-학기를-맞이하는-교수자들께-오영진

AI가 대학 교육을 좀먹고 있다고? 교육자들의 대응법은 / 강부원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00491

콜로키엄에 대한 이메일 피드백 / 은림(소설가)

https://judicious-herring-629.notion.site/3154cec4a8e8803d93dbe633138e2ca5?source=copy_link

당일 참가자 토론창 내용 전체

https://judicious-herring-629.notion.site/1-3154cec4a8e880bda654c49284f40a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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