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사랑 (Maudie)>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조용했던 어느 오후,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 주연의 영화 <내 사랑(Maudie)>을 아주 재미있게 봤다. 사실 주연 배우들의 명성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선택할 만한 이유가 되었겠지만 이날은 왠지 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눈물 쥐어짜는 신파나 너무 알콩달콩 간지러운 로맨스가 아닌 담담하지만 애틋하고 요란스럽지 않지만 여운이 남는 그런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은 날이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 주인공인 모드는 선천적인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한 여성이다. 그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빠로부터 버려져 숙모집에 얹혀살며 평생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잡화점에서 입주 가정부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되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남자의 집을 찾아간다. 평생 꿈꿔온 독립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관절염으로 온몸이 불편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받던 모드는 에버렛의 집에서 일하며 어느새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간다. 녹록지 않은 형편에도 그녀는 모든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며 "Suits me(난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불평불만 없이 슬기롭게 헤쳐나간다.
그뿐 아니라 먹고사는 일에만 열중하는 에버렛에게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싫어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라며 돌직구를 날리며 사랑을 쟁취하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에버렛은 무식하고 괴팍하며 일밖에 모르는 고달프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우수에 찬 남자였다. 무뚝뚝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그는 몸이 불편한 모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무시하고 난폭하게 대하지만 점차 그의 어두운 삶이 알록달록 모드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에버렛의 집안 곳곳에 채워지는 그녀의 그림처럼.
모드가 문에 방충망을 달아달라고 하자 그동안 그런 거 없이도 잘만 살았다며 에버렛은 화를 낸다. 하지만 어느새 말없이 문을 달고 있는 장면은 마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부부들의 모습과 닮아있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버렛이 툴툴거리면서 츤데레의 전형대로 모드를 위해 잡다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 어떤 영화 속 뜨거운 사랑보다 더 크고 대단해 보였다. 그들 안에 사랑이 싹트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며 가슴으로 뜨겁게 응원했고 에버렛이 서서히 변화하며 어느 순간 상황이 역전되는 듯했을 때는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다. 사랑이 성장하는 과정들은 잔잔하고 소소했지만 충분했다.
아직 이 영화를 못 본 분들을 위해 결말은 접어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멍하니 그 검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잔잔한 감동이 커다랗게 뭉쳐져 가슴이 벅차올라 충만해졌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 주인공이 갖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단단하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감동이라 참 신선했다.
모드의 마지막 말은 "I was loved(나는 사랑받았어요)"였는데 이 말 한마디로 <내 사랑>은 내가 최근 본 로맨스 영화 중 단연 최고가 되었다. 구멍 나고 꾀죄죄한 낡은 양말 같았던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며 보듬어주고 물들어가며 하얀 면양말이 되고 고운 감청색 양말이 된다.
만약 우리 부부가 낡은 양말 한 쌍 같은 커플이라면 우리는 어떤 양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보리 메리노울 양말? 통풍 잘되는 기능성 스포츠 양말? 아니면 점잖은 아가일 패턴 양말?
뜨겁고 열정적인 로맨스에 지쳤다면 모드와 에버렛의 사랑 이야기를 추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감동과 여운이 많이 남았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