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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배추 Jun 12. 2024

백일동안 매일 쓰는 일기

47. 간단한 삶

간단한 삶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할까 싶다. 인생이란 건 정말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처럼 지리멸렬하며 끝없는 인내의 연속이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 복잡해지라고 부적이라도 붙여 놓고서는 빌고 있는지, 간단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눈덩이처럼 점차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는 감당이 안되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봄날 얼음 녹듯이 모든 게 스르르 사라져 있다. 어쩌면 인생자체가 요지경이라 이성적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자꾸만 통제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은 여름철 목폴라스웨터라도 입은 것처럼 답답하다. 결국 수많은 변수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계획을 짜며 통제하려고 애쓰고 만다. 물론 P의 성향이 매우 강한 나는 꼼꼼한 계획보다는 매우 느슨한 일정을 짜며 스스로 만족하는 편이다. 오늘은 뭘 할 것이며, 내일은 어떻게 지낼지에 대해서 일기장에 쓰면서, 마치 노트한 것만으로 오늘의 할 일은 다 한 것처럼 뿌듯해한다. 문제는 오늘의 기분에 따라 그 일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인생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앞서서 나부터 통제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맥시멀리즘인 나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버리고 간소화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별로 사지도 않았던 옷들은 어느새 옷장 가득해졌는데, 그 옷들을 정리하면서 은근히 내 마음도 비워지기 시작했다. 옷장이 홀가분해지니 옷들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고, 몇 개 안 되는 옷이지만, 경우의 수만 따져 보아도 꽤나 많은 조합을 낼 수가 있다. 그릇도 많으면 무엇하랴. 당장이라도 아름다운 그릇을 한 아름 구입해서 계절식탁을 꾸미고 싶지만, 매일 같은 그릇을 어김없이 사용한다. 그게 해지면 그때서야 사고 싶었던 새로운 그릇을 살 예정이다.


어제는 내 작은 친구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너무 간소화를 하다 보니, 작은 방에 내놓을 작은 상조차 없더랬다. 그럼, 쟁반에 받쳐서 주면 되지만, 문제는 쟁반도 없다. 부끄러운 손을 내밀며 그 당사자인 아이는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혼자서 “우리 집에 쟁반이 없어서 이렇게 주고 마네.”라고 하였다. 아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꾸뻑. 둘이 놀라고 에어컨을 켜주고 문을 닫고 나갔다. 밖에서 창문을 열고 뜨거운 공기가 잠입한 거실에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우당탕 달려가 확인하지 않았더니, 바닥을 다 찍어 놓았더랬다.


‘아, 베이블레이드만 해도, 경기장을 써도

바닥이 찍히고 까지는구나.‘를 깨달았던 하루.


그리하여 나의 간소한 삶에는 쟁반은커녕, 작은 방에 놓을 러그를 검색하기에 이르렀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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