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서막 뉴욕의 ‘오키드쇼’

봄이 오면 가던 그곳 1: New York Botanical Garden

by 남배추

겨울과 봄의 경계는 두루뭉술하여 확연히 끊어지는 구간이 없다. 겨울이 안 끝나네 싶다 보면 어느새 봄이곤 한다. ‘이 놈의 겨울 지긋지긋하다’하는 순간 우리의 턱 밑에 봄이 다가와있는지도 모른다. 인생도 이런 계절의 변화와 비슷해서 나의 불행이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벼려서 그 흩어진 마음의 흔적을 이어 붙일 수가 없던 시점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미국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인사발령에 맞추어 휴직을 해야겠단 생각만 했었는데, 나는 건강 상의 이유로 자연스럽게 휴직을 하게 되었다.


3월이었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이라는 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JFK공항 밖을 나갔을 때 날씨는 매서웠다. 바람이 동서남북으로 불고 있어 옷깃을 세워 얼굴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 날선 바람에 봄이 실려있을 줄이야.


그래서일까. 봄의 대표적인 행사인 뉴욕보태니컬가든의 ‘오키드쇼’는 두꺼운 코트가 아직 필요한 2월에 시작한다. 오키드쇼의 기간은 보통 2월 말에 시작해서 4월 초에 끝나기 때문에 오키드쇼가 끝날 무렵에는 동네에도 여기저기 꽃이 피기 시작한다.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는 난초.

이 난초는 사람의 습성과도 닮아, 습도에 민감하다. 겨울철 습도가 낮아지면 목이 칼칼해져서 감기에 잘 걸리고 마는 사람 같다. 게다가 주변균에 대한 의존도도 높으니,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점과도 같아서 군자도에 그리 자주 그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방치하면 잘 자라지 못하는 난초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다. 그래서 이 사람 같은 난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다. 장미와 같은 열정의 꽃으로 볼지 아니면 수줍어하는 첫사랑의 형태일지 내가 나에게 내기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 본 오키드쇼는 오리지널형태가 아니었다. 코로나 때문에 조금 변형된 형태의 ‘Spotlight On Orchids 2021’으로 진행되었는데 원래 있던 식물사이에 군데군데 난을 데코한 정도여서 적잖이 당황했다. 그럼에도 겨울에 바라보는 난은 소중했다. 참 신기한 게 오키드쇼를 보고 와서 며칠이 지나면 항상 거리에는 꽃이 피워지고, 두꺼운 코트는 이내 필요 없어지곤 했다. 오키드쇼가 봄을 불러일으킨 건지, 봄이 오키드쇼를 보고 더욱 서둘러 다가온 것인지.


2022년도에 들어서야 오리지널형태의 오키드쇼가 선보였는데 초록에 화려한 난초의 꽃들이 어우러지니 그 자태는 봄 그 자체였다. 인생이란 게 뿌리째 뽑아서 다시 시작할 수 없지만 화려하게 수놓은 것처럼 흩뿌려져 있는 난은 혼자 오롯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난을 보면 생각한다.

봄이 오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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