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새해를 맞이하는 나만의 두 가지 방법
가끔은 어제 먹은 점심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희한하게도 처음 겪었던 경험들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갔을 때가 그랬고, 타국에서 처음으로 살아본 교환학생시절이 그랬다. 처음이라는 사건이 갖는 신선하고도 막강한 힘은 어벤저스의 인피니트스톤과도 같은가 보다.
그래서인지 처음이라는 단어는 거창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쓰이는 게 또 처음이라는 단어이다. 오늘 먹은 첫끼, 오늘 본 첫 뉴스와 같이 매일 일어나더라도 처음이라는 관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그 처음은 하루에 1번뿐일 수도 있고, 20가지가 넘는 비슷한 사건들의 연속이 되기 때문일까? 1월 1일 역시 365일을 지나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한 해의 첫날이며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특히나 외국에서 보내는 새해는 색다르기까지 하다.
사실 뉴욕의 첫 새해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뉴욕의 새해는 두 번째로 맞이했던 브루클린 브릿지부터이다. 어쩌면 만삭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뉴욕이었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외국이었기 때문에 만 가지를 즐기고 싶었던 새해였지만, 만삭의 몸으로는 쉽지 않았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새해 첫 해돋이를 맞이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2014년 1월 1일. 뉴저지에서 맨하탄을 거쳐 브루클린브릿지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지만, 브릿지의 방향이 해가 돋는 동쪽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 건물들에 가려서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다만, 거뭇했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붉은 선이 아래에서 위로 번지는 그 광경만이 가능했다. 저녁 늦게 해가 지는 모습을 거꾸로 돌려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적잖이 실망한 광경이지만, 다시 새해 첫 해돋이를 보러 브루클린브릿지로 가게 된다면, 커피를 담은 물통과 돗자리를 가지고 가서 해돋이보다는 그 순간에 거기 있었음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2022년 새해를 앞둔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새해를 즐겨보겠다며, 2021년 12월 31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뉴욕의 최대이벤트인 볼드롭에 대해서 계속 검색하게 되었다. 볼드롭이라는 건, 타임스퀘어에 만들어진 커다란 볼이 1월 1일 00시가 되면 아래로 살짝 내려오면서 불꽃이 터지고 종이가루가 날리는 행사이다. 물론 그 이전에 가수들의 공연도 있어서 볼거리가 있지만 공짜새해이벤트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보통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 볼드롭이 시작되는 12시간 전부터 대기가 시작되는데, 무조건 일찍 가서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점점 밀려나서 무대와 멀어지게 되면 공연도 안 보이고 볼드롭도 안 보이고 꽃가루도 저 멀리서 날리는 것만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자리를 잡는 순간, 화장실과는 이별이다. 그래서 경험자들은 하루 전 날부터 물을 먹지 않고 지내기를 충고하거나, 어른용 대형기저귀를 추천하기도 한다. 너무 끔찍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처럼 피자배달은 가능하니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물론 볼드롭을 편하게 보는 방법이 있다. 돈을 쓰는 방법이다! 물론 돈을 어느 정도 쓰느냐에 따라 볼드롭이 보이는 실제화상도가 달라지고 접근성에도 차이가 생긴다. 가장 돈이 많이 들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메리어트호텔의 바에서 보는 방법인데 general admission을 내고 들어가면 가격은 1500달러이지만 볼드롭이 보이는 바에는 발도 못 디디게 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단, 볼드롭 전에 클럽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다고 한다. 만약 볼드롭까지 확실히 보이는 바로 진입하려면 3000달러 정도 가격을 지불해야 가능한데, 인당 3000달러 이상이기 때문에 월급노동자로써는 탕진의 개념이 아니고서야 감히 살 수 없는 가격이다. 대신 조금 더 저렴한 방법으로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파는 식사권인데,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경찰관에 따라 행사시간 전에 볼드롭이 보이는 곳으로 진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고 불가한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은 일찍 가서 볼드롭까지 대기하는 것! 하지만 나는 늙었다. 아이도 있다. 그럴 마음적 육체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볼드롭을 보고 싶었다. 그래도 돈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밤 10시에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대로 있는다면 다른 여느 날들과 같기에, '이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라는 마법의 문장을 되새기며 지하철을 타고 록펠러센터로 이동했다. 물론 타임스퀘어로 바로 내리면 좋겠지만, 이 시간대에는 이미 그 근처 지하철이 모두 폐쇄되고 많이 이동가능한 역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보통 밤 11시가 되면 뉴욕거리는 더 어두워지고 조금 무서워진다. 왜인지 음침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강도라도 만나서 내 아이폰을 당장 빼앗아갈 것 같은데, 새해 전날이라서 그런지 가족단위나 연인들, 친구들이 모두 나와서 한 해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순간, 50번가 이후부터 바리케이드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볼이 떨어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주위 사람들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했고, 종이가루가 날리는 타임스퀘어를 보았으며,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축하해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가루는 자정이 지나고도 30분 정도는 하늘을 흩날린다. 역시 귀찮아도 모든 건 해보는 게 나은 거 같다. 나이도 들고 매일 피곤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성인기저귀를 차고 볼드롭을 기다리며 피자를 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