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글로브, 권투장갑

등근육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불러일으킨 쇼핑

by 남배추

넷플릭스에서 이시영배우의 등을 보게 되었다. 근육이 단단히 잡힌 뒷모습은 나의 등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지녔더랬다. 언젠가 그녀와 비슷한 듬직한 뒤태를 가지고 싶었는데 아무리 운동을 한들 근육이 붙지 않았다. 어쩌면 내 몸에 탑재된 유전자는 100을 일하면 1 정도만 근육이 붙는, 효율성 꽝인 불완전성을 가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끈기 하나만큼은 꽤나 풍족한지라 ‘열심히 하면 등근육이 생기겠지.’라는 마음으로 권투를 시작해 보았다.


권투는 샌드백을 향해, 혹은 스파링대상자의 글로브를 타깃으로 주먹을 팡팡 내리꽂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해보니 체력이 가장 우선시되는 운동이었더랬다. 즉, 운동을 잘못 골랐단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펀치는커녕 앉았다 일어났다 엎드렸다 쪼그렸다 난리가 났는데, 효율성 제로의 나의 세포들은 당황한 듯 보였다. 너무 힘들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입술을 꽉 깨물고 버티고 있었다. 혼자서만 철퍼덕 주저앉아버리기에는 티가 너무 나서 온 힘을 짜내어 점핑잭스를 했다. 점핑잭스가 사실은 악마가 고안해 낸 운동이란 걸 그날 깨달았다.


코치가 드디어 누우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내 다리를 번쩍 들라고 한다. 못 들은 척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나 빼고 모두 다리를 들고 있었다. 다들 나 몰래 보약을 먹고 온 것 같다. 그들처럼 나의 다리는 올라가려 하지 않았지만, 배에 힘을 단단히 넣고는 어떻게든 공중으로 다리를 띄워 보였다. 부들부들 떨렸다. 그 상태에서 다리를 내렸다 올렸다 하며 어깨의 힘을 빼라고 한다. 옆을 보니 또 다들 입을 앙 다물고 열심히 하고 있더랬다. 혼자 설렁설렁하려다가 코치와 눈이 마주쳤다. 영어로 지도당할 것 같아서 나도 같이 입을 앙 다물고 버텼다.


‘이게 권투수업이 맞나?’


의심이 갈 무렵, 코치가 글로브를 끼라고 했다. 첫 수업이었기에 체육관에서는 쓰던 글로브를 빌려 주었다. 정말 권투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신이 나서 어깨 빠져나가라며 힘 있게 내리쳤다. 내가 좀 멋져 보였다.


하지만 글로브를 뺀 순간, 손의 땀과 오래된 글로브의 냄새가 한데 같이 섞여 대단한 냄새가 났다. 흠칫 놀라서 다시 글로브에 손을 집어넣고 말았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으나 반납해야 했기에 손소독제를 이용해서 냄새를 닦아냈다.


‘쇠똥구리가 내 손을 훑고 갔나?’


그 쇠똥구리 손을 가진 나는 첫 수업 후 이틀 동안 걸어 다니질 못했다. 하지만 권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설렁설렁하는 곳을 찾아 등록했다. 그곳은 클럽처럼 음악을 틀고 몸을 흔들어가며 권투를 가르쳐주었다. 깜깜한 곳에서 비트에 맞춰 잽을 날리는데 신이 났다.


그 신바람은 글로브의 구입으로 이어졌다. 물론 글로브대여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진심을 다해 연습하겠다며 90달러, 자그마치 1주일 식량의 반에 해당하는 돈을 권투장갑에 바쳤다. 문제는 대여글로브랑 똑같이 생기다 보니 청소아저씨분이 집에 갈 때마다 걷어가려고 하지 않는가. 동양인이 나뿐인데 기억을 못 하고 자꾸만 달라고 해서, 이거 사는 사람 나 밖에 없냐라고 물어보니 그가 대답했다.


“내가 여태까지 두 명 본 거 같아. 너까지.”

“…”


청소아저씨는 자기도 볼 수 있게 글로브에 크게 이름을 쓰라고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나의 이름이 적힌 복싱글로브를 보여주지 않아도 서로 인사하며 지나가는 사이가 되었다. 더 이상 권투는 하지 않지만 가끔 그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의 권투글로브는 지금 방구석을 돌아당기고 있다.


아저씨!
잘 지내고 계시죠!
저같은 사람이 또 오면
복싱글로브 못사게 말려주세요.
알았죠,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