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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배추 May 05. 2024

백일동안 매일 쓰는 일기

15. 연차휴가

이혁진작가의 ‘사랑의 이해’에는 한 커플이 잘 맞는지 재확인하기 위해 금쪽같은 휴가를 내고 9일 동안 한집에서 지내며 같이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장을 본다. 직장인에게 휴가란 게 얼마나 소중한데, 단지 집에 있기 위해 휴가를 썼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는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단지 9일 만에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 게 한 길 사람 속이라고 했다. 대학교에서 예쁜 동기와 잘생긴 선배가 서로 사귀게 되었다. 연예인같이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선배가 같은 과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잘 어울렸고 잘해준다고 했다. 뭔가 멋져 보이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녀가 부러웠다. 그런데 그 선배에게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 선배는 예쁜 동기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온갖 욕정을 참아낸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를 지켜준다는 명목 하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욕망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셋 다 가여웠다. 그 선배를 믿은 동기도,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그 선배도, 그 선배를 차마 내치지 못했던 그녀도. 사람은 역시 어렵다.


똑똑한 주인공이 단 9일 만에 상대방이 결혼에 적합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리란 건 알았겠지만, 아무래도 겸연쩍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선택이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9일을 여행도 안 가고 집이라니..라고 보니 나 또한 연차를 2개 붙여서 지금 5일째 집에만 있는 상황이다. 내일도 집에 있을 예정이라 내일이 되면 9를 거꾸로 한 6일만큼 집순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집과의 궁합만큼은 나를 이길 자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흔들림 없는 확신이다.


예전의 나는 휴가 때만큼은 밖에서 온 에너지를 불태우던 사람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의 효용이라도 뽑으려는 사람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잰 다음에야 내 자식새끼마냥 소중한 연차를 썼었는데, 한번 길게 쭉 쉬고 싶다는 생각에 집에만 있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길게 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수많은 일을 겪고야 말 것이고, 좋게든 나쁘게든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몇 년 전만 해도 내 휴가를 내가 쓰는 데에도 사유를 쓰고 결재를 올려야 했다. 보통 ‘개인사정’ 아니면 ‘병원’ 등 모두가 쓰는 암묵적인 고정용어가 있었는데, 같이 일하시던 분이 사유에 ‘냉장고가 고장 났음.’이라고 쓴 걸 보고 냉장고를 고치는 그분이 떠올라서 마치 4D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유를 쓰는 란이 없어져서 이번 휴가의 명목 상 이유인 ‘실밥 풀러’라고 쓸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병원에서 수술실밥도 풀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오고, 동네 앞을 어기적 걸으며 게으름뱅이버전으로 보낸 이번 휴가. 덕분에 난 더 심각한 게으름뱅이가 되었지만, 항상 바삐 움직이던 뇌도 유난 떠는 일이 없었고, 부산스럽던 마음마저도 휴가를 가서 매우 잔잔하게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여름휴가는 타지가 아닌 내 집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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