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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천천히 걷다.

도쿄 3박 4일 여행

by 도시남자 수식씨

올해가 어느덧 절반을 향해 가는 지금, 문득 회사 근태표를 들여다보다가 알게 됐다. 연차를 단 하루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물론 공휴일 덕분에 쉬는 날은 많았지만, 스스로 정한 휴식은 없었다. 연차 소진이라는 회사 방침에도 부응해야 했고, 최근에 밀린 일들도 어느 정도 정리된 참이라, 지금쯤 잠깐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 계획 없이 3박 4일 일정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맛있는 걸 먹고, 천천히 걷고, 유명한 장소에서 사진도 찍어봤다.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여행 방식 세 가지를 조용히 꺼내 펼쳐본 시간이었다.

도쿄에서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다카오산. 산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된 숲길로 되어 있어 오르기에도 편했고, 조용한 분위기 덕분에 내 마음도 자연스레 차분해졌다. 일본 사람들의 절제된 조용함을 나는 늘 좋아한다. 말없이 걷고, 필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그 분위기. 참 좋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하산할 때 리프트를 탈 수 있었다는 것. ‘내리막이 더 힘들다’는 건 진리 아닌가. 내 무릎도 이제 나이에 민감한 편이라 유료임에도 감사하며 내려왔다. 원래는 ‘주 1회 등산’이라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던 일정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에 남는 장소가 되었다.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에노시마다. 도쿄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마을, 그리고 그곳을 따라 달리는 오래된 에노덴 전철. 선로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은 마치 시간도 함께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을 준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고 전철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그 고요한 순간이 좋다. 뭔가를 찍기 위해 서 있지만, 사실은 그 기다림 덕분에 마음이 쉬고 있었다. 철도 선로와 해변이 나란히 이어진 풍경은 언제 보아도 특별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곳은 언제나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들어주는 장소다. 다만, 에노시마가 언제나 조용한 건 아니다. 최근엔 ‘가마쿠라쿄코마에 역’ 같은 핫플은 사람들로 붐비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런 쪽은 피하고, 조용한 길, 조용한 시간대를 골라 걷는다.

맛있는 것도 참 많이 먹었다. 도쿄 긴자 시내에서 장어덮밥, 튀김덮밥, 오마카세 스시까지. 이름만 들어도 벌써 포만감이 밀려오지 않나. 하나같이 비주얼도 훌륭하고 맛도 좋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계산서를 보는 순간, ‘이 돈이면 집 앞에서 삼겹살 세 번은 먹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행 와서 먹는 데 아끼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숙소에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계란말이, 크림빵을 먹었는데… 왜 그렇게 맛있는 거지? 약간의 혼란이 왔다. 혹시 나는 미식가가 아니라 그냥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까? 맛집 찾아다니는 취미가 아니라, 배고프면 다 맛있는 체질이었던 걸까. 순간 약간의 정체성 위기를 느꼈다.

유명한 장소도 들렀다. 도쿄 스카이트리를 멋지게 볼 수 있다는 스미다 공원에 갔고, 이어 센소지 절에도 들렀다. 스미다 공원은 의외로 한적해서 산책하기에도 참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사진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찍어보며 ‘어떻게 찍으면 더 멋져 보일까’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스카이트리를 눈으로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진은 잔뜩 찍었지만, 마음속 기억은 어딘가 흐릿했다. 돌아와서 보니, 풍경을 감상하러 간 건지, 피사체를 사냥하러 간 건지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센소지 절은 그와 반대로 정말 사람이 많았다.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 많은 공간에 취약한 내게는 그 시간이 거의 독 같은 코스였다.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랜드마크에 가서 인증샷을 남기는 여행은 내게 잘 맞지 않는다는 것. 조용한 길을 천천히 걷는 편이 훨씬 더 오래 남는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피해야 하는지를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화려한 인증샷보다는 조용한 골목을 걷는 시간이 좋았고, 이름난 맛집보다는 편의점 음식에도 충분히 만족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동 중에 짧은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릴스를 만들고, 숙소에서 씻고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 순간들이 진짜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앞으로는 더 다양한 걸 시도하기보다는, 이미 좋아하는 것들을 더 자주 누려보고 싶다. 여행도, 일상도. 조금 더 단순하게, 그리고 더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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