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느 딜망
한동안 영화는 가벼운 걸 위주로 골라봤다. 보고 나면 기분 좋아지고, 머리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들. 그런 게 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가볍기만 한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진짜 현실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의 깊이가 얕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화라 불리는 작품들을 하나씩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로 Sight and Sound 선정 1위 영화, 잔느 딜망을 택했다.
줄거리는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 아니, 설명할 줄거리 자체가 거의 없다. 프랑스로 보여지는 지역의 중년 여성 잔느 딜망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침에 아들을 깨우고, 아침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외출을 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이런 일상이 반복된다. 그 사이 사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집에서 매춘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긴 러닝타임 대부분을 가사노동 장면으로 채운다. 보통 남성 감독이었다면 이런 설정을 포르노처럼 다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다. 가장 자극적일 수 있는 부분을 완전히 생략하고,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느낄 장면만 정면으로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이건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설명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일상에 집중할 수 있나’ 싶을 만큼 반복적인 가사노동을 통해, 말 없이 무언가를 보여준다. 어떤 삶의 무게랄까. 어떤 정체성의 균열 같은 것. 그렇게 세 시간 넘는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20분이 되어서야 작은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그 변화 하나로 영화는 긴 침묵을 끝낸다. 보는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끝나고 나서는 묘하게 생각이 많아졌다.
1975년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세상이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던 시절, 여성의 일상을 중심에 놓고, 그 반복과 침묵 속에서 현실을 말한 영화. 그렇다면 지금, 2025년의 시선으로 봐도 여전히 혁신적인가?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도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생각하면, 잔느 딜망은 지금도 충분히 유의미한 영화다. 방식은 조용했지만, 메시지는 날카로웠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재밌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보길 잘했다’는 생각은 들었다. 앞으로 계속 이 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또 어떤 영화들을 만나게 될까.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씩 보고 나가야겠다. 때로는 이런 무거운 영화도, 삶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