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설익은 라면 인생은 이제 그만
어느덧 12월의 끝자락이다. 달력을 한 장 남겨두고 거울 앞에 섰는데, 거기엔 내가 기대했던 ‘여유 넘치는 40대 중반의 신사’는 없었다. 대신 사소한 일에도 미간에 깊은 고랑을 파며 짜증을 장착한, 웬 예민한 아저씨 한 명이 서 있더라. 가만히 올 한 해를 복기해 보니 참 부끄러운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문제는 늘 내 마음속의 ‘연쇄 반응’이었다. 회사 업무가 조금이라도 꼬여도 속으로 ‘아, 일이 왜 이리 안 되지’라며 발을 굴렀고, 그 부정적인 에너지는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튀어나갔다. 마음이 급하니 말은 꼬이고, 서두르다 사고를 치는, 그야말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조상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산 한 해였다. 지나고 보면 그게 다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나 싶다. 내년엔 정말이지 이 미간의 주름부터 좀 펴고 살아야겠다.
이런 반성을 하게 된 건 최근 알고리즘이 데려다준 ‘Julley Film’이라는 여행 유튜버 덕분이다. 중앙아시아 자전거 횡단을 마치고 지금은 히말라야 EBC 트레킹을 하고 있다는데, 이 채널은 좀 이상하다. 자극적인 자막이나 요란한 리액션이 전혀 없다. 그저 길 위의 풍경, 바람 소리, 그리고 정갈한 음악과 차분한 자막이 전부다. 남들은 조회수 뽑으려고 안달복달하며 컷 편집을 1초 단위로 쪼개는데, 이분들은 느릿느릿 걷고 숨 쉬는 걸 가만히 보여준다. 화면 속 히말라야의 공기가 모니터를 뚫고 전해지는 기분이랄까. 그 영상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삭막한 지하철 인파 속에서도 마음만큼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닿는 평온함을 느낀다. ‘아, 저게 진짜 여행이고 진짜 사는 건데’ 하는 부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돌이켜보면 내 여행은 늘 ‘극기훈련’ 아니면 ‘도장 깨기’ 같았다. 올해 8월, 살인적인 무더위의 교토를 방문했을 때가 절정이었다. 혼자 떠난 여행이니 여유로울 법도 한데, 남들 다 간다는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를 하루 만에 다 돌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버스 노선을 확인하며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사진 찍기-이동-사진 찍기’를 무한 반복했다. 저녁엔 다리가 퉁퉁 부어 숙소에서 기절했는데, 나중에 남은 건 스마트폰 속 수백장의 사진뿐, 그 절들이 무슨 색이었는지 바람은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저 "교토는 덥다"는 강렬한 생존 기록만 남았을 뿐이다. 인생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라면 물이 끓기 시작하면 5분을 못 참고 젓가락을 들이밀어 늘 설익은 면을 씹어대는 성격이니 오죽할까. 덜 익은 라면은 소화라도 안 되지, 덜 익은 인생은 매사가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2026년은 좀 ‘덜 익은’ 것들을 기다려주는 한 해로 만들고 싶다. 거창한 목표는 아니다. 라면 면발이 충분히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부터 길러볼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딱 2초만 더 상대를 바라보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것, 그냥 흘려보냈던 일상의 순간들을 꼼꼼하게 기억해 보는 것 말이다. 마음속에서 짜증이라는 불길이 올라올 때, 한 템포 쉬어가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소화기를 뿌려보는 연습도 필요하다. 사실 나 같은 중년 독거남에게 이런 정서적 여유가 히말라야 등반보다 더 어려운 도전이겠지만, 적어도 내년 12월의 거울 속에는 미간이 좀 펴진, 인자한 동네 형님이 서 있기를 기대해 본다.
뭐, 정 안 되면 내후년에 또 결심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인생은 길고, 라면은 어차피 또 끓여 먹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