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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belbyme Jul 06. 2022

가망 없는 인간이 되고 싶다

소진된 인간: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은 들뢰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소진된 인간과 피로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로한 인간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피로로 인해 현실화할 수 없는 인간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것처럼 엄청나게 힘든 일을 마치고 소파에 누운 듯 앉아 있는 상태이다.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중에서 모든 것을 제한하고 한 두 가지 가능성만을 실현시키는 사람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가능성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포기해 버렸다.'는 사무엘 베케트의 글처럼 그에게는 무엇 하나 남은 가능성은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오류를 알려준다.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은 이미 거기에 있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다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가능성을 제한한다. 가능성이 실현화되는 방법은 기존 법칙이나 관습을 그대로 따를 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내가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을 연습으로 실제화한다고 가정해본다. 이 경우 나는 훌륭한 첼로 연주를 위해 기존에 있던 첼로 교본과 연습 방법을 통해서 첼로를 배울 것이다. 가능성이 실현될 때  방법은 기존 클리쉐를 답습할 뿐 창조적인 것은 없다.


소진된 인간은 남아있는 가능성이 자체가 없는 인간이다. 가능성이 없으므로 기존 방식으로 일을 완료할 수 없다. 소진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쿼드 드라마에서는 4명의 사람이 거의 같은 복장, 같은 키, 같은 방식으로 사각형 안의 꼭짓점을 돌아다니다. 그냥 무작위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합에 따라 사각형 안을 움직인다. 공간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면서 공간을 소진시킨다. 또한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다 궁극적으로는 육체를 소진시킨다. 공간과 신체의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와 창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친구, 회사, 학교, 가족, 연인 모든 인간관계에서 노력을 했지만 어려움을 느낀다고 가정해보자. 관계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가능한 모든 관계가 작동할 하지 않으므로 사람은 전혀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대안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이다. 물질적이고 대상이 있는 관계를 떠나, 비록 추상적이지만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자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창조적인 시도를 감행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나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가망 없는 인간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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