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구멍난 스타킹을 신은 날.

설마가 진짜인 그런 날.

by 주니준

아침, 허겁지겁 스타킹을 신는다.

왼쪽 엄지발가락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설마 오늘 신발 벗을 일이 있겠어?’

구멍난 것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갈아신기 귀찮아. 오늘 신발 벗을 일 없다. 절대. 네버.ㅎㅎ'


출근 후 점심 약속이 있었고 도착한 식당.

세상은 늘 예상 밖으러 흘러간다.

점심 사준 사람은 평소에는 가정식 백반 좋아한다며 학교 앞 작은 분식집에서만 밥을 먹는데

오늘은 또 뭐한다고 한정식 사준다고 사람을 끌고 오는 것이며,

하필 온 곳이 왜. 내가 구멍난 스타킹을 신은 이 날. 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왜.

자꾸 구멍난 스타킹을 뚫고 나온 왼발 엄지발가락이 신경 쓰여서 일행들 먼저 들여보내고 맨 나중에 입장.

그리고 한쪽 신발을 벗고, 나머지 신발을 벗으며 신발을 신발장에 넣는 척하며

살짝 구부려 안 그런 척 왼손을 왼발 쪽으로 내린다.

엄지발톱으로 밀려나간 스타킹을 발가락 끝까지 끌어올려 발가락 사이로 꾸물꾸물 밀어넣고 있는 그때.


정면의 누군가가 옷는다.

식사 중이던 아주머니, 모든 걸 본 듯 미소 짓고, 나도 어색하고 웃었다.


세상은 가끔 설마가 나를 잡아 먹을(?) 때가 있다.

중고등학교 때 '설마 오늘 쪽지시험 보겠어?', '보더라고'.

젋을 때 '설마 오늘 내가 딴 녀석하고 데이트한 걸 알겠어?', '알더라고'.

그리고 지금 '설마.....?' '아니. 진짜.'

느낌이 쎄하다 싶을 때. 그 '설마'가 '진짜'가 되어 나에게 온 날.

구멍 뚫린 스타킹 신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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