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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사장의 서고 May 29. 2018

미국 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바라보는 세계

아재들 삼국지 썰풀이가 아닌 진짜 전문가의 식견을 읽자

 요즘 북한과의 화해 무드가 무르익으며, 국제정치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는 빈도가 무척 늘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당연한 거고, 종편에서 비전공자 패널들이 뱉어내는 얘기들도 대부분 아재들의 삼국지 썰풀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보인다. 그런 썰풀이 말고, 진짜 전문가가 얘기해주는 국제 정세는 없을까? 자신 있게 추천한다. 진짜 전문가의 책, <거대한 체스판>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저, <거대한 체스판>을 읽었다. 먼저 고백하건대, 나는 사실 이 책을 읽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여지껏 거시적인 다자외교나 국제전략이라는 것이 별로 실체가 없는 '썰'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으니까. 물론 내가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에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다. 원래 생물계열의 학문을 공부하다가 약학 분야로 옮긴 순수한 이공계생이다 보니, 나에게 가장 익숙한 현상은 미시적이고 상대적으로 명확한 기작을 가진 것들이다. 세포 내 신호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미생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몇 마이크로미터 수준의 물질 단위로, 수용체 단위로 배우는데 거시적으로 국가 간 세력권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들이 얼마나 모호해 보였겠는가. 게다가 비전공자 입장에서 저런 얘기를 듣는 경우는,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이 본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진영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이상한 썰을 푸는(이제 중국이 뜬다, 미국은 지는 해 따위의) 것이 전부였다. 딴에는 정말 불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고, 정말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다. 내가 그간 접했던 '국제전략'이라는 것은, 내 전공분야에 비유하자면 쇼닥터들이 TV에 나와서 헛소리하는 수준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의학은 수준이 이따위구나'라고 오해했었다는 것도. 국제전략은 비교적 명확하게 특정 국가의 현실을 짚고, 그를 바탕으로 미래의 국가 간 권력관계를 예측한 다음, 그런 예측을 국익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각종 외교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꽤나 치밀한 학문이었다. 그런 학문을 두고, 동네 아저씨들이 잔뜩 목에 힘을 주고 거시적인 관점을 표방한 자기과시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니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전공자는커녕 전문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저자인 브레진스키는 미국 카터 행정부에서 외교안보 전략을 담당하던 특별보좌관으로, 폴란드 태생이다. 그래서 소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경험인 지식들을 갖고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냉전시기 대(對) 소련 강경책을 주문하여 냉전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카터 행정부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이어갔는데, <거대한 체스판>도 그 시기에 쓴 책이다. 책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륙이자 지금은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다른 대륙에게 넘겨줘버린 유라시아를 기준 전개된다. 냉전 이후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획득한 미국이 유라시아의 주요 지역들에 대해서 어떠한 외교안보 전략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할지를 제안하고 있는데, 세계 최강국의 외교안보 전략을 세우던 뛰어난 외교 전략가가 은퇴 이후에 쓴 책이라 그런지 정말 깊이가 너무 다르다. 각국에 대하나 현황 파악은 물론이고, 그네들의 한계와 미래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낸다. 책이 나온 것이 98년이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예측과 전략이 유효하다면 얼마나 대단한 책이겠나? 실제로 미국은 그가 요청하였던 것들을 대부분 달성 중이고, 그 안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책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좋겠지만, 브레진스키가 생각하는 한국에 대한 전략을 간단히 옮기자면 이렇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 최강국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동아시아에서 지배적 국가가 될 것은 비교적 예상 가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서 여러모로 유럽의 영국에 가까운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일본'이고, 그 덕분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불침 항공모함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이 팽창하며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가면, 동아시아에는 일본만이 남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일본도 정상국가 형태로 변화하고 미국의 영향권에서 탈출하려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의 주한미군은 그러한 동아시아 내에서의 미국 영향력 감소 도미노를 막아주는 동시에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점에서 현상유지가 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북한과의 경제적, 군사적 격차가 수십 배 차이가 나는 중이고 한국의 민족적 열망이 매우 큰 편이므로 언젠가는 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으리라 기대되는데, 주한미군이 주둔 중이라면 중국은 통일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주한미군 철수 - 통일 승인(+ 중국 영향권으로의 포섭)' 형태의 빅딜이 성사될 수도 있다는 것이 브레진스키의 우려. 그래서 그는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현상유지를 말하면서도, 브레진스키는 한 가지를 더 덧붙인다. 중국을 억누르기 위해 동아시아 국가 간에 중국에 적대적인 연합을 구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중국에 마냥 관용적이지도 않되, 적대적 연합을 구성해 압박하지도 않음으로써 중국과의 적대 구도를 만드는 자기실현적 예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직접적으로 적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중국의 경제력이 성장함에 따라 민주화도 이루어지고 이래저래 내부적 변화가 올 수 있다고 기대를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책은 이런 식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지역별 분석과 향후 전략을 꽤나 심도 있게 다룬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 같은 국가가 왜 중요한 건지, 크림반도가 왜 중요한 건지라던가 유럽연합의 통합이 왜 중요한 것인지 등의 현재도 뜨거운 이슈들을 이미 20년 전에 예측한 셈이다. 물론 이런 것이 단순히 지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자께서 통렬히 적으셨듯, 우리는 미국의 그리는 지정학적 전략의 일부이며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전략에는 핵심적인 지역이다. 당장 싸드 보복으로도 우리 생활에 이런저런 직간접적인 영향이 왔었는데, 그 이상의 국가적 영향이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긴 힘들 것 같다. 




 또한 좀 더 현실적으론, 국내에서의 각종 정치 이슈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어느 정도 큰 틀에서 이해하게 되어 꽤나 흥미로웠다. 가령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단체들이 의도하고 있건, 의도하지 않고 있건 간에 그것이 실현된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에 대한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달까? 비슷하게는 "한일정보협정" 따위, 혹은 "중국과의 균형외교"같은 것들도 그런 예에 해당될 수 있겠다. 최근의 "한미일 군사동맹" 발언도 마냥 한쪽에서 주장하는 것처럼만 읽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저 브레진스키가 하던 역할을 문정인 특보가 맡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 적잖이 놀랐다. 미국의 전략에 한국의 전략이 완전히 합치될 필요는 없겠다만, 음. 




 미국의 국제 전략가가 미국인을 위해 쓴 책이고, 책에서도 대놓고 그것이 가장 주된 목표라고 쓰고 있는 책이니 만큼 걸러서 볼 필요는 있겠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꼭 한 번 정도는 읽어보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별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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