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폐증을 대하는 태도
중학교 즈음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영화관에서 봤던 것 같은데,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몇몇 코믹한 장면들(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방구는 밖에서 따위)은 기억에 남았지만, 마라톤에 도전한 자폐아의 성공스토리가 담긴 그저 그런 휴먼스토리 영화랄까. 정말 그게 인상의 전부였다.
그러다 며칠 전, 지인의 추천을 받아 <말아톤>을 다시 봤다. 지금 보면 정말 다른 느낌일 거라는 말에 약간 긴가민가하며 봤었는데 정말 너무 다른 영화였다. <말아톤>은 자폐아 윤초원(조승우 분)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윤초원의 어머니 초원엄마(김미숙 분)였다.
영화 자체는 자폐증을 앓는 윤초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사를 좀 더 극단화하기 위해 자폐증이라는 소재를 끌어왔을 뿐, 초원엄마는 사실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평범한 엄마다. 우리 애가 잘 됐으면 좋겠고, 우리 애가 남들이랑 뭐가 다르냐는 일반적인 한국 부모의 인식을 갖춘 그런 사람. 문제는 윤초원이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 대한 보호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야 당연하고, 보통은 나이를 먹어가는 자녀와의 갈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탈피하게 된다. 그런데 윤초원은 5살의 수준의 정신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자폐로 인해 일반적인 수준의 아동으로 행동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그렇게 초원엄마는 평생을 극단적 보호자로 살며, 윤초원이 그보다 딱 하루 먼저 죽기를 바라는 바라는 본말이 전도된 삶을 살아내기 시작한다.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실존인물의 삶이 어떠한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극에서 보이는 윤초원의 삶은, 그의 삶 전부를 초원엄마에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아동-부모의 관계를 보여준다. 신체적으로 성인이 된 윤초원은 훨씬 어리던 시절에 보여주던 초코파이에 대한 비정상적 열망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부모의 지시에도 꽤나 높은 순응도를 보인다. 좋게 말하면 자폐아동의 사회성이 증가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엄마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그는 스스로의 욕구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가령 코치와의 훈련 장면에서, 운동장을 돌라는 말에 윤초원은 끊임없이 코치에게 질의를 한다. 몇 바퀴 돌아요, 몇 바퀴 돌아요, 몇 바퀴 돌아요. 이에 짜증이 난 코치가 100바퀴를 돌라고 하자, 그는 정말 100바퀴를 돈다. 극에서는 이것이 미담으로 사용된다. 무협지에서 클리셰로 등장하는, 힘든 허드렛일을 묵묵히 함으로써 제자로서 인정을 받는 그런 장치. 코치가 윤초원의 순수함과 의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이자, 초원엄마가 코치를 불신하게 되는 계기로서 스치듯 지나가지만 사실 이 장면의 의의는 따로 있다.
코치건 초원엄마건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윤초원이 '몇 바퀴를 뛰어야 하냐'를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한다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자폐증 환자니까 그 욕구마저도, 그 판단마저도 '온전한' 성인에게 모두 위임해야 한다는 불성실한 판단. 극에서는 윤초원이 끊임없이 초코파이와 얼룩말을 좋아한다는, 스스로의 욕구와 판단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관객을 포함한 모두는 이를 어떤 '증상'의 하나로 치부하고 만다. 그리고 그 거대한 편견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윤초원의 춘천 마라톤 출전이다.
초원 엄마는 병상에서 남편에게 고백을 한다. 본인은 스스로를 위해 현실의 윤초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윤초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에게 고통을 줬다고. 그렇지 않으면 보호자로서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는 그런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초원엄마는 아들에게 마라톤을 시키기를 중단한다. 그의 보상 욕구로 인해 아들이 원치 않는 일을 시키지는 않겠다던 결심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윤초원이 '마라톤이 좋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조차 그의 의지가 아니라 단정을 내리니까. 그리고 윤초원이 스스로의 의지로 춘천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윤초원 역시도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며, 스스로를 옭아매던 것은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이었음을.
<말아톤>은 성장 영화다. 아마도 윤초원 본인보다는, 윤초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성장하는 영화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