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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사장의 서고 Aug 05. 2018

이어령이 읽어낸 1960년대의 한국인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다시 읽기

 서평의 서두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이어령 씨를 잘 몰랐다.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나이가 차면 대충 원로 취급을 받는 한국 사회의 여러 인물들처럼 그도 그저 그런 사람인가 했다. 그럼에도 이분의 책을 집게 된 이유는 어디선가 접한 딱 한 문장 때문이었다. 1960년대 판 헬조센론. 이제는 유행어가 아니라 일상어가 된 듯도 하지만 60년대에 나온 헬조선론이라니, 어떤 내용일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이어령 씨가 1962년 ≪경향신문≫에서 동명의 코너로 연재했던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60년대 초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으면 진즉 작고를 하셨어야 될 것 같은 나인데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찾아보니 그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던 나이는 고작 스물여덟. 난 사람은 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책은 무척이나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신문지면 위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보니, 한 주제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가기보단 칼럼마다 개별적 완결성을 지닌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긴 할 테다. 덕분에 다양한 것들을 읽는 재미는 있지만, 짧은 지면에 나름의 완결성을 지닌 글을 싣다 보니 논리가 어그러진 이상한 것들도 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노크 없이 들이닥치는 무뢰한이 많은 까닭인지, 심지어 사무실 도어에다 '요(要) 노크'라고 써붙여 둔 데가 있다. 이것도 하나의 희극이다. 노크를 강요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私室) 아닌 사무실에서까지 노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쩍은 일이다.

대체 그 사무실 속에서 무슨 일들을 하고 앉아 있기에 노크를 하라는 것일까? 무슨 음모가 아니면 위조 지폐라도 찍고 있는 것일까? 여사무원과 달콤한 연애? 그렇지 않으면 나체주의자들이 사무를 보고 있는 것일까?

노크를 강요한다는 것은 스스로 내실의 비밀을 고백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요 노크'의 문자는 '지금 이 도어 안에선 남이 보아서는 안 될 망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라고 써붙인 것과 맞먹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상 노크 자체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누가 혼자 사는 숙녀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고 하자. 극단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기실 그 숙녀의 행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나체가 된 그 숙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어령, <기침과 노크> 중 일부


 그렇다곤 하나, 그가 포착한 한국인의 모습들은 지금에 봐도 꽤나 통찰력이 있다. 객관적 인과에 대한 토의가 아니라 ‘눈치’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한국인, 싸움에 있어서도 직접적 주먹다짐보단 그네들을 둘러싼 군중에게 비판과 동정을 받기 위한 말싸움을 벌이는 한국인, 관계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서양인과는 달리 타인과 관계를 ‘맺는(tie)’ 한국인, ‘나’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곧잘 쓰는 한국인 등 한국인들의 습성을 읽어내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날카롭다. 이런 부분들이 마치 한국인의 습성을 비판하는 ‘헬조선론’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나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멸시적 비판은 조금 별개의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날카롭게 현상을 드러내는 것과, 마음에 안 드는 인간 군상들의 멸시를 위해 단점을 날카롭게 부각하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지 않은가.



 예컨대 과거 조선 지식인들은 본인들이 앞장서서 ‘식민사관’으로 보일 법한 얘기들을 해댔다. 조선인들은 이러이러한 것이 문제라는 둥, 조선인들은 저러저러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둥 피상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도 헬조선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은 조선이 근대로 이행하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한 것일 따름이지, 동포들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참고: 코리안 타임은 왜 생겼을까) 나는 이어령 씨의 글들도 그 맥락 위에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가령 이런 글을 보면 그가 한국 민중들에게 가지는 애정이 정말 뚝뚝 묻어난다.


그것은 달을 사랑하는 님프(요정)의 넋이라고 했다. 달을 너무도 그리워한 까닭에 별을 시기하게 되고 끝내는 그 때문에 제우스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리하여 달도 별도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되고 달님은 그 님프를 불쌍히 여겨 그를 찾아다녔다. 제우스 신은 그것을 눈치 채고 구름과 비를 보내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연연한 그리움을 안고 나날이 야위어가던 님프는 드디어 숨을 거두게 되고 그 넋은 어느 언덕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풀 하나가 생겨나고 어두운 밤에 홀로 달을 기다리는 외로운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달맞이꽃이다.

그런데 우리의 토속어로는 그것을 ‘도둑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요즈음은 그 꽃을 ‘달맞이꽃’이라고 하나, 그것은 월견초(月見草)를 우리말로 그냥 옮긴 데에 불과하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이 백성들은 밤에 피는 그 꽃의 자태에서 달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쓰라린 현실의 일면을 보았다. 다른 꽃들은 모두 어둠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생각이다. 즉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어령, <달맞이꽃과 도둑놈꽃> 중 일부


 조금 낡은 한국의 모습을 다루는 것들도 있고,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풍습을 두고 그에서 유추한 것들을 한국인 정신의 근간이라 칭하는 모습이 약간 의아한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60년이 흘렀음에도 바뀌지 않은, 여전히 익숙한 모습들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한국인의 본질적 특징에 가깝지 않을까? 지금 읽어도 유의미한 옛 책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별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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