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읽는 한국의 식민지기
나는 한국의 근대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다. 정확히는 일제강점기라고 불리는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의 기간과 그보다 조금 이른 고종의 집권기 즈음. 이공계 출신이, 그것도 역사와는 거리가 무척이나 먼 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저 시기에 대해서 특별히 찾아서 공부하지 않고는, 그 즈음의 실상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다.
당장 3.1절과 같은 기념일만 해도 그렇다. 한국에서 정규 교과과정을 배운 사람 중에 3.1절과 만세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을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던 민중이, 3월 1일을 기해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였다는 정도의 건조한 서술이 고작이었다. 구체적으로 상상 가능한 그 즈음의 상황. 그것이 너무나 궁금해서 나는 근대를 읽기 시작했고, 그 여정 중 하나가 박성호·박성표 저, <예나 지금이나>다.
저자인 박성호 박사님은 무척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시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史를 공부하면서, 당시 조선 땅에서 출판되던 신문과 잡지의 다수를 ‘입력’하셨다. 이 입력이 무엇인고 하니, 당대의 기록물들을 디지털화해서 문서 파일 형태로 남기는 작업이다. 요즘 기술도 좋은데 OCR로 적당히 입력하면 되지 않겠냐 싶겠지만, 저 작업은 생각보다 꽤나 고도의 정신노동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당대 신문에서 국어/국문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고 해 보자. 우리야 당연히 한국어/한글이라 생각하겠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해당 표현이 지칭하는 의미가 일본어/일문일거다. 그런데 조금 더 이전에는, 한국어/한글이 아니라 한문일 수도 있다. 당시의 한글은 ‘언문’이었고, 국문이라 함은 한자어를 뜻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일을 취미(?)로 하시던 분이 당대의 신문들을 읽으며, 당대의 특수성은 물론 현재 한국 사회와 가지는 유사성을 짚어 책으로 묶었다.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소위 말하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흑인 차별과 같이 구조적 원인을 개인들에게 돌리는 것에 가깝다. 2시간 단위의 인시, 묘시 따위의 시간 단위로 살아오던 한국인들이 갑자기 분 단위의 세계로 던져지면 저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우리가 ‘식민사관’이라 칭하는 조선의 폐습에 대한 지적은 생각 외로 조선 내부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조선에 산재해있는 각종 악습과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되잖겠나. 그래서 조선의 식자층들이 먼저 그런 일들을 시작했던 것인데, 다른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쉬이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단순히 뇌피셜 ‘썰’이 아니라, 당대의 기사를 통해 읽어내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보니 신뢰성 역시 무척이나 높다. 그런 점에서, 매국자(?)건 애국자건 한 번 쯤은 읽어보는 것이 좋은 책이리라 확신한다.
물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는 과거의 기사들에서 현재와의 동질성 역시도 탐구를 한다. 그런데 그런 해석의 몇몇 대목들은 내 기준에선 잘 동의가 안됐었다. 예컨대 과거 국가들 간에 통용되던 사회진화론적 시각들이 식민주의를 불러왔듯, 현재의 경쟁적이고 신자유유주의적인 풍토도 다른 방식의 예속을 불러올 수 있지 않겠냐는 식의 서술은 나의 정치적 성향과는 좀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 재밌는 책이라 생각한다. 근대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조각 하나가 더 늘었다. 개인적 별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