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띠링~
‘**집 흑수박 오픈 일정 안내합니다.’~
단 한철, 4월에만 맛볼 수 있는 ‘수박계의 에르메스’. 가치 있는 농업을 실천하는 함안 ‘**집 흑수박’이 출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픈 시간 기다렸다가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주문하려 보니 이미 품절. 너무 늦어버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아직은 식사를 세 숟갈 정도는 먹을 수 있었던 즈음, 메마른 땅을 뚫고 가늘고 어린 순이 돋아날 무렵, 엄마는 갑자기 수박이 먹고 싶다고 했다. 하루에 세 숟갈을 먹이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하고 있던 터라 그 말은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당시 엄마의 병명을 신부전증으로 알고 있었기에, 모든 음식을 저칼륨, 저인, 저단백, 저염식으로 준비했다. 단백질은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영양소지만 신장 기능이 떨어진 환자에겐 독이 될 수 있다. 단백질이 소화되면서 나오는 요소, 질소,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재료에 신중을 기했다.
하루 중에 가장 많이 먹는 쌀이 특히 중요하다. 저 아밀로스, 저 단백질인 ‘밀키퀸’으로 밥을 지었다. 찰진 쌀이라서 일반 밥과는 취사 방식이 다르다. 일반 밥보다 물의 양을 줄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그 양을 맞추지 못해서 죽 같은 밥을 만들기도 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세상에서 가진 맛난 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꼬꼬데 냄비’에 10분 불린 쌀을 넣고 밥물을 자작하게 붓는다. 쌀과 물의 비율은 1: 0.7. 중간 불에서 나무 주걱으로 저어 가며 물이 잦아들 때까지 익힌다. 그 다음에 약 불에서 10분 더 끓이고, 뚜껑을 닫고 10분 뜸을 들이면 완성된다. 노릇노릇한 누룽지가 생기고 쌀알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뽀얗고 찰진 밥이 되었다.
밥 하나 하는 데도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야 파듯이 세 숟가락을 드셨다. 일반 압력밥솥에서 지은 밥은 전혀 드시지 않아서 매일 가서 해드렸다. 오늘은 무엇을 해드려야 드실까? 모든 신경이 엄마 식사에만 쏠려 있었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는 날은 너무 속상해서 화도 내고 협박도 했다. 다시는 엄마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거라고.
그런 엄마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시다니. 설화 속, 노모가 겨울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효성 지극한 아들이 고생 끝에 구해 드린 이야기처럼 나도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가장 맛난 수박을 사드리고 싶었다.
맘카페, 블로그, 온갖 사이트를 뒤지다가 마침내 함안의 수박 농장을 찾아냈다. 4월 수박이 제일 맛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한 요리사의 ‘일 년 내내 기다리는 수박’이라는 글에 내 마음이 확 넘어갔지만 반신반의하며 첫 주문했다.
한끝의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시간과 보살핌이 들어간 수박은 마트에서 파는 평범한 수박과는 완전 달랐다. 진한 초록색에 줄무늬는 희미했으나 반들반들 윤기 도는 껍질, 좌우 대칭이 완벽한 형태.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왔다. 예술이다. 예술.
엄마에게 잘라주기 전에 한 입 먹어봤다. 이름처럼 정말 ‘꿀수박’이었다. 달콤하고 아삭한 과육의 시원함이 입안에 오래 머물렀다. 만물의 건강함이 혀끝에서 피어나는 듯 했다.
그날, 엄마는 수박 반통을 하루에 세 번 나눠 드셨다. 먹는 모습을 보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엄마가 수박을 한 조각 한 조각 드실 때마다 예뻐서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리 엄마! 세상에서 제일 멋져! 이제 먹고 기운만 차리면 되는 거야.”
2차 출하 일정에도 재빠르게 주문했고 2주 후에 다시 수박이 도착했다. 하지만 그때는 엄마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냉장고에서 맛있게 먹어줄 주인을 기다리던 꿀수박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결국 썩어갔다. 서울에서 병간호 후 집에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한쪽 구석에 자리한 싱싱함을 잃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주인을 기다려 주지 않는 녀석이 야속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엄마와 겹쳐 보였고, 버리기도 싫을 정도로 미웠다.
‘내 다시는 너를 보지 않을 테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맞나보다. 올해는 초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며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난다. 1차 주문이 실패하자 2차 출하 일정 때는 빛의 속도로 주문했고 드디어 기다리던 흑수박이 두통이나 도착했다. 받자마자 이 달콤함에 기뻐할 아름다운 얼굴들이 스쳐갔고 덩달아 내 자신도 미소 한가득 지었다.
‘오예~~오늘은 사랑하는 이들과 수박파티다!’
어렸을 때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나고 고름이 생기면 그곳은 쳐다보기도 싫고 만지지도 못하고 밴드로 가려두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밴드를 떼면, 어느새 그 곳에 딱지가 앉아있었다. 피부 위 두툼하게 올라온 단단한 딱지를 손끝으로 매만져본다. 쫀득쫀득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었던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웃으며 매만질 수 있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수박을 가지런히 예쁘게 잘라 놓았다, 그중 가장 맛있어 보이고 사랑스런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천천히 한 입 베어 문다.
참으로 달다. 달아. 그리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