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기피증’이 있는 나는 물건 살 때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남들은 쇼핑하면 행복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린다지만, 나는 정반대다. 사고 나면 항상 “괜히 샀나? 다시 반품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물건을 받으면 일단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보고 엎어보고 매의 눈으로 세심한 관찰을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들보다 하자를 재빠르게 발견한다. 하지만, 그게 또 문제다. 하자를 발견하면 환불이나 교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참 고통스럽다.
나의 병적 시초는 언제부터일까? 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나는 ‘체스터필드 스타일’의 소파를 샀다. 그런데 한 달 만에 쿠션의 튜프트 버튼이 풀려버렸다. 방석이 세 개인데 하나씩 차례대로 하자가 생겼고, 각각 따로 AS를 받다보니 마감처리나 조임 정도가 제각각 달라서 영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이건 진중한 하자라 생각해서 본사에 세 쿠션을 동시에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도 없이 전화한 끝에, 일 년이 지난 시점에서 교체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냥 써도 무방할 터이다. 하지만 한 번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영 불편해 지는 것이다. 층간소음에 귀가 트이면 작은 소리에도 신음하는 것처럼.
이런 일이 쌓이다 보니 물건 사는 일은 거의 고문 수준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사고 나면 ‘저것을 살걸 그랬나?’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손해를 볼까?’ 무엇을 골라도 완벽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결정이 마비됐다. 그래서 나만의 쇼핑 원칙을 만들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금액 안에서 최고로 비싼 물건 무!리!해서 사기.’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선물로 책상을 사주기로 했다. 당시 대만에서 만든 높이 조절 책상이 인기였다. 버튼식 컨트롤러가 있어서 간편하게 높낮이 조절이 가능해, 앉아서 공부하다가도 곧바로 서서 작업할 수 있는 인체공학적인 제품이었다. 당연히 금액은 상상 초월이었지만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사하면서 그 책상은 가족 누구도 방에 들이고 싶지 않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연두색의 밝은 색감은 아이 때나 어울렸고, 강철 소재의 상판은 영원히 사용할 법하게 튼튼했다. 그 점이 더욱 질리게 했다.
우리 집 가전제품 또한 평균 수명이 15년 이상이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결혼 전 혼수로 마련한 냉장고다. 당시 상냉동 하냉장 디자인이 대세였고, 좌우 양문형 냉장고가 막 출시되던 시절이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최고 프리미엄 제품인 메탈 블루 컬러 모델. 가격은 엄마가 책정한 예산의 두 배 가까이였다. ‘나만의 쇼핑 원칙’은 아마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가전제품은 가장 좋은 것을 사야 이익인 거지? 저렴한 것 사면 10년 사용하지만 비싼 것 사면 또 알아 평생 쓸지? 그게 오히려 돈 버는 거 맞지?”
엄마의 눈동자에도 은근히 번지는 갈망의 빛이 서렸다. 일주일 고민 끝에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정말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지금까지 고장 한번 없이 효자 노릇 돈독히 하며 우리 가족의 주방 한 켠을 지켜줬다. 내부 선반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으로 내려앉아 테이프로 고정해야 하고, 고무 패킹 등 손상이 되어 외모는 볼썽사납지만 성능은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사만 해도 다섯 번을 겪었는데, 냉각 성능도, 전력 소비도, 모터 소음도 변한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전원을 켜면 “저 건강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작년에 이사할 때는 새로운 냉장고를 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맘에 쏙 드는 냉장고를 찾아냈고 이제 이 녀석만 보내면 되는 상황. 남편과 나는 “이사 가기 전에 고장 나라~ 얍!”하며 농담처럼 주문을 걸기도 했다. 기왕 시원하게 고장이 나 미련 없이 털어내고 싶었다. 새집에 들어가면서 그 누가 고물 냉장고를 가지고 가고 싶을까.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새집에 와서도 묵묵히 일하며, 아무 말 없이 가족의 식탁을 지켜냈다. 그러니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아침에 일어나보니 냉장고 앞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문이 꽉 닫히지 않으면 가끔 물이 새어 나와 고이기도 했기에, 남편에게만 잔소리를 퍼부었다.
“자기야 냉장고 문을 두 번 세 번 꼭 확인해야 해. 우리 냉장고도 이제 늙었어. 잘못하면 저세상 간다고.”
그 후 또 몇 주간 이상 없이 잘 돌아갔다. 그럼 그렇지 우리 냉장고는 불사신이야. 하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치 강아지가 오줌을 지린 듯 또 흥건한 물 자국이 있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물이 고이는 여러 이유를 찾아보고 자가 점검을 해봤는데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오래돼서일까? 모델번호를 입력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려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제품’이라는 말만 반복됐다. 이젠 정말 보낼 때가 된 것이다.
내 아이의 이유식으로 가득했던 그 내부, 한여름엔 과일을 신선하게 품어주던 공간, 생일마다 설렘 가득한 케이크가 놓였던 자리, 엄마가 만들어 주었던 반찬으로 빼곡했던 그 냉장고는 단순한 가전이 아니었다. 나의 일상이, 가족의 시간이, 수많은 기억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기를 응원하며 주문을 걸고, 고장 나라고 말했던 게 미안하다며 혼잣말도 했다. 생명이 있든 없든, 이별은 언제나 어렵다. 아마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기억을 떠나보내는 것이 두려운 거겠지. 그만큼 내 삶에 소중한 추억이 많았다는 뜻일 테고, 그걸 품은 수십 년 결혼 생활도 성공적이었단 뜻이겠지.
마지막으로 전원을 끄고, 냉장고 문을 열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차곡차곡 쌓인 평범한 나의 일상들에게.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