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에서 감사함으로 바꾼 책 한 권
최근에 원치 않게 자주 주거지를 옮겼다. 이제는 짐 싸기에 도가 터서 수납공간에 맞게 잘 정리하는 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사를 앞두고 보니 예상치 못한 수많은 물건들이 나를 아연질색하게 만든다.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 거실에 쌓는다. 무더기를 보니 적잖이 소름이 끼친다. ‘물건’과 ‘나’ 중에서 누가 주인인지 헷갈릴 판국이다. 이 물건에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깝기도 하다. 분명 쇼핑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우리의 수많은 행위들이 삶을 얼마나 낭비하는지 강력하게 비판한 미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근대적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월든 호숫가에서 자급자족하는 간소한 삶을 실험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 소로처럼 나도 스스로 질문을 쏟아낸다.
일단 옷, 책, 주방용품, 잡동사니로 품목을 크게 4개로 가른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잡동사니. 분류하기도 어렵고 물건 하나에 추억이 곁들여져 손에서 놓기 힘들다. 하지만 나만의 방법이 있다. 바로 선발전을 갖는 것. 순위 안에 들어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서로가 자신이 최고임을 자랑하는 듯 추억담을 늘어놓는다. 눈을 꼭 감고 유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이를 꽉 깨문다. 최종심사평을 한 후에는 후회 없이 과감히 버린다. 남편처럼 몰래 가서 주워오는 행동은 내 사전에 절대 없다.
이번에는 복병이 있었다. 작년 한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걸 본 나는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삶이 허망했고 매일매일이 울적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겠지. 삶이란 게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 끝나다니’라는 생각에 지쳐갔다. 마음속에서 오로지 카페인과 당에만 의지해 살았다. 언제 내가 회복될 수 있는지. 내 안의 두려움을 언제 지울 수 있는지. 같은 일을 겪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하나같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해결책을 스스로 찾다 보니 작년에 구매한 책만 200권이 넘어갔다.
소유할 수 있는 책은 한정적이고 기존 책을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 정리하다 보니 한 권 한 권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먼지를 쓸어내며 깨끗이 닦아 세 부류로 나누어 쌓는다. 아들의 추억이 담긴 책, 나보다 다른 이에게 더욱 필요한 책, 내 분신과도 같은 책이다. 그중 작년에 선물 받은 최애의 책을 집었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를 그림동화로 엮어낸 <살아있다는 건>.
무더운 여름날, 근처에 사는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일본여행에서 사 온 조그만 선물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만나자마자 일본 전통 문양 <벚꽃의 잎과 꽃 패턴>이 그려진 붓 펜을 선물 받았다. 일본 곳곳의 생생한 여행담을 나눌 때는 규슈지역에서 교환학생으로 보낸 시절이 생각나 회춘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젊은 시절이 떠오르자 모처럼 기분이 흥겨웠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선생님의 에코백 위로 삐죽이 나온 한 권의 책등을 몰래몰래 훔쳐봤다.
‘붓 펜을 받았으니 내 선물은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뭐지.’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해서 손톱만 긁어댔다. 내 마음을 아셨는지 수줍은 미소를 띠며 하얀색 에코백에서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선생님, 일본 서점에서 득템한 책인데 너무 좋아요. 제가 좋아했던 동화인데 오리지널 원서를 보니 무조건 사야겠다 싶었죠. 일본어 잘하시니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가지고 나왔어요.”
표지에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일본의 3층 서민주택이 있다. 베란다마다 각양색색의 빨래들이 널려있고 아이에게 모자를 건네는 엄마가 보인다. 어떤 느낌의 책일지 기대하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간결한 그림들이 눈에 쏘옥 들어왔으며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책 한 페이지에 있는 어스름한 긴 그림자를 뒤로하고 자녀 집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수박 한 통을 들고 어딘가를 향하는데 그곳은 자신의 생일파티를 준비한 손주손녀가 있는 아들의 집이다. 단출하지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림 속 생일파티 자리에는 할머니가 없다. 단지 작은 액자 속에서만 밝은 미소를 띠며 존재할 뿐.
“살아 있다는 건, 지금 살아있다는 건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지금, 순간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
보는 내내 저절로 ‘너무 좋네. 좋아.’라는 감탄사를 흘렸고 선생님은 이 책을 그대로 내 품에 안겨주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꼭 갖고 싶어 거절하지 않았다. 이 책이 있다면 내 삶도 제자리로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생일이면 엄마가 축하해 주고 밥을 사줬던 기억이 떠올라서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10년 만에 새 차를 사자 기쁨보다 눈물부터 흐른다. 엄마가 서울로 병원을 급하게 갈 때 20년 된 오빠 차로 힘들게 이동한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도 ‘엄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처럼 엄마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대로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내 옆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 이렇게 한 숟가락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매번 감사한다. 특히 내 옆에서 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아빠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선생님, 좋은 책 선물해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