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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 스탁 Dec 31. 2023

나 홀로 타이완 [感] - ②

보이는 것을 보는 것으로



디자인은 시(示)를 관(觀)으로 바꾸는 것



박웅현 CP ⓒ 디자인 프레스 블로그


내가 가장 존경하는 크리에이터 박웅현 디렉터가 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示) 대로 인식하면서 마치 스스로 주관을 가지고 보는 것(觀)처럼 착각을 한다는 뜻이고 디자이너는 그것을 바꾸어 보여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내 디자인에 적용하려고 노력해 왔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도대체 무엇을 아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몇 가지 정보, 인상, 느낌을 봤다고 정말 아는 것일까? 심지어는 주입식 교육이나 좁은 자기 경험에 갇힌 채 그걸 신념으로 삼은건 아닐까?


그는 대한민국 광고에 처음 인문학적 관점을 도입했다 ⓒ 중앙일보


일본 놈들이 그렇지 뭐, 중국이 중국 했네. 이런 건 관점이 아니다. 반대로 역시 천조국은 다르구나, 프랑스는 아름다워.. 이런 것들도 관점이 아니다. 헛소리에 가깝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라고 했구나 싶다. 생애 첫 혼자 여행에서 느낀 바가 커서 두 번째 여행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해 좀 더 겸손하게 다가가 보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나 홀로 타이완 [感] - ② > 편을 마지막으로 대만 여행기를 마무리합니다.


PS. 부록으로 여행 준비과정에서 알게 된 최신 여행준비 꿀 팁을 쓸 예정입니다. 이 포스트 하나만 있으면 줄 서거나, 어디 가실 필요 없이 핸드폰으로 거의 모든 준비가 다 되실 겁니다.







캐릭터, 그림 천국


나는 우리의 삶과 소통에 있어 그림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사람이다. 언어의 구조는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나눌 수 있다. 랑그는 우리가 쓰는 각자 다른 물리적 언어이고 파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관념적 언어이다. 꽃, flower, 花 랑그는 다르지만 이 말을 들은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은 모두 머릿속에 똑같은 파롤 즉, 꽃의 형상을 떠올릴 것이다.


ⓒ Tony Stock


따라서 잘 만든 캐릭터, 삽화, 그래픽을 통하면 해석의 차이를 줄일 수 있고 더 기억에 남길 수 있다. 디자이너로 살면서 대한민국만큼 그래픽에 인색한 나라도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공공기관 웹사이트에 인포그래픽(infographic, 정보와 그래픽을 혼합한 방식)을 넣는 문제로 피를 토하며 싸웠던 기억이 있다. 표들을 왜 그리 좋아하시는지..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공공그래픽의 발전 수준은 한참 모자라 보인다.


ⓒ Tony Stock
ⓒ Tony Stock
ⓒ Tony Stock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들이 실력이 있어도 생계를 유지할 시장이 좁다. 무형의 가치에 둔감하고 비용으로만 생각한다. 제일 많이 듣는 말이 '그기 돈이 됩니까?'이다. 그러니 간판부터 인쇄물, 웹사이트까지 덤핑에 가까운 염가시장이 장악했다. 회사에서 담당하시거나 자영업자분들이 계시다면 싸구려 디자인을 양산하는 저가 착취 온라인 플랫폼, 가격이 싼 디자이너 찾지 마시길 바란다. 그게 바로 자신의 수준이 된다.


 ⓒ Tony Stock


귀국 때 찍은 인천 공항버스 안내판이다. 정말 글자 크기, 강약, 사용자의 의식의 흐름 따윈 개 무시한 처참한 인터페이스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 가까운 매표소는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얼마나 가까운가?

2. 교통카드, 현금이 X가 아니라 카드, 현금 아이콘도 넣었어야 한다.

3. 가운데 정렬로 글자를 써서는 안 된다. 공간 낭비가 심하고 가독성이 떨어진다.

4. 파란 바탕에 빨간색 X, not은 색약, 색맹 등 사람에 따라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5. 노선표에 기울어진 깨알 같은 영문이 보이기나 하나? 디자이너 누구야? 좀 맞자.

6. 상단 LED, 중간 LCD, 옆에 붙은 승차권 예매필수 간판까지 세 가지를 따로따로 봐야 된다. 스페이스 설계를 잘하면 LCD에 다 표시하고도 남는다.

7. 승차권 예매필수라는 말은 드라이버 복장을 한 캐릭터가 말하듯 약간의 움직임만  주면 눈에 확 띌 것이다.


사용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저런 결과물이 대한민국 최대라는 인천 공항에 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무엇 보다 요즘 시대에 교통카드를 안 받는다? 정책도 노이해다.



글씨 많이 없이도 가능하다 ⓒ Tony Stock
이런 것들이 아티스트들의 일자리다 ⓒ Tony Stock


대만은 일본의 영향인지 곳곳에 캐릭터와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신호등만 해도 사람이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을 넣었다. 공공시설물에도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잘 그렸다. 맥주공장은 삭막한 담장을 훌륭한 홍보그래픽의 장으로 만들었고, 건물의 벽화들은 '난 이런 걸' 말하고 싶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삭막한 공장의 담벼락이 광고 갤러리가 됐다. ⓒ Tony Stock
모던 아트 수준이다. ⓒ Tony Stock
아이덴티티가 명확해진다 ⓒ Tony Stock


경직된 사회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가르친다. 예술과 범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복궁 담장 테러 같은 정신 나간 사건도 있었지만 제발, 그림 좀 그리자. 진짜 실력자들에게 돈을 주고 말이다. 우리나라 담장의 초등학생 그림 수준의 벽화들은 그만 보고 싶다.


저렴한 숙소 벽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벽화 ⓒ Tony Stock
거리를 통째로 예술로 만든 재미있는 발상의 카페 ⓒ Tony Stock
통신설비다. 이렇게 잘 그릴 일인가 ⓒ Tony Stock



이미 선진국


전체적인 분위기를 볼 때, 대만인들의 문화와 의식 수준은 충분히 선진국이라 생각된다. 공공 인프라에 적용된 체계성을 보면 그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지하철, 버스, 교통 체계 등 매우 체계적이고 한국보다 오히려 더 잘되어 있다. 시설이 좋다는 게 아니라 배려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비롯 많은 시스템은 대만으로부터 도입한 것들이다.) 딱 필요할 때 고개를 돌리면 안내가 보이게 되어있다. 공무원들 일 잘하는 것 같다. 결과물이 좋다는 것은 의사결정 구조가 좋다는 말이다.


이해하기 쉬운 인포메이션 ⓒ Tony Stock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두리번 하는 순간 필요한 방향 정보가 딱 들어온다. ⓒ Tony Stock
거의 모든 버스가 장애인, 노약자가 타기 쉬운 저상버스다 ⓒ Tony Stock


공공질서를 잘 지킨다. 줄 서는 건 기본이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본 스린 야시장의 길바닥에 이쑤시개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분리수거 세계 1위 대한민국보단 못하지만 다들 시장 진입로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을 이용한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길거리에 쓰레기통을 다 없애 버린 것이다. 주변이 담배와 침으로 범벅이 된다는 이유다. 그런데 정도껏 했어야지. 아예 없애 버린 우리나라 길이 대만보다 쓰레기가 더 많다.


인파란 이런 것이다. ⓒ Tony Stock
대만 최대 스린 야시장 ⓒ Tony Stock
질서 정연해서 놀랐다 ⓒ Tony Stock


오래된 것들을 부숴버리기보단 필요한 만큼만 고쳐 쓴다. 그래서 세월의 흔적 위에 첨단 기술과 새로운 질감이 덧입혀진 도시가 나에겐 더 매력적이었다. 불도저로 밀어버린 대한민국의 과거가 아쉽게 느껴진다. 지금의 MZ 세대를 비롯 레트로 열풍이 불어 옛것을 지킨다고 하지만, 힙지로(을지로)를 가봐도 문화라기보다는 트렌드에 불과함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을지로 인쇄골목, 철공소 거리를 곧 다 밀어 버린다는 도시계획이 있다.


타이베이 중앙역사. 역사가 묻어난다 ⓒ Tony Stock
전통적 느낌이 나는 지하철역 디자인 ⓒ Tony Stock
낡은 것 위에 덧댄 것 ⓒ Tony Stock
묘한 매력이 있다 ⓒ Tony Stock


활기차(보인)다. 대만 역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지만, 경제구조가 대기업 독점이 덜하고, 중소기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취업, 재취업이 우리나라 보다 빠르다. 아직 로드샵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아 거리가 활기차 보인다. 어딜 가든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 놓았고 무엇보다 삭막한 분위기가 아니다.


낭만 있고 활기차다. ⓒ Tony Stock


며칠 지난 어느 날 피로가 누적되어 숙소로 빨리 복귀했다. 사워를 하고 누우려던 찰나, 이상하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길 모퉁이에서 음악소리가 크게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록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곳이 도교사원이었던 것이다. 음악과 공간의 이질감이 신비로웠다. 밴드 이름은 알 길이 없지만 나름 팬층이 있는 그룹 같았고 90년대 홍대 인디밴드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의외의 발견에 너무도 행복한 저녁이었다.


무계획 여행의 기쁨 ⓒ Tony Stock






첫 6일간 묵었던 자리 ⓒ Tony Stock


이 작은 공간에 몸을 뉘어보니, 내가 사는데 필요한 게 지금 캐리어에 담긴 것들 말고 딱히 필요한 게 없구나 싶다. (내 밥줄인 맥북은 빼고) 물론, 여행자의 하찮은 감상인 줄 안다. 다만 나의 삶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새롭게 투영되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이번여행은 내게 값지다.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게임하고 있다 ⓒ Tony Stock


같은 호실에서 같이 묵어 좀 친해졌던 미국인은 대만에 한 달 동안 머물며 디지털 노매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사진 왼쪽 끝 친구다. 같이 식사라도 하려고 했지만 서로 일정이 안 맞아 못했다. 음악 칼럼을 쓴다는 일본인 친구와는 인스타그램 맞팔을 했다. 사실 이런 건 처음 해본다. 여전히 부족한 사교성에 길게 대화를 잇기는 어렵다. 그래도 다들 호감을 가지고 다가와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뭐 어쩌겠나.


이번 여행에 떠날 용기를 준 여행전문가 친구가 해 준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2024년은 크고 작은 여행을 결심하는 해가 되시길 바라며..



여행은 마음을 먹었을 때, 이미 시작된 거예요. 일단 가시면 다 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타이완  ⓒ Tony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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