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시대정신이 깨어나는 해가 되길 소망하며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시인이 1968년 발표한 '산문시 1'의 전문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내 가슴엔 무언가 뭉클함이 밀려왔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었고 감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깨어남이었다. 배고픈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 무지렁이 나에게 이 시는 사회적 자아를 일깨웠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을 때 내 머리와 가슴에서 몰려오던 그 뜨거움. 나의 무지와 무관심이 어디서 왔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지 시인은 가르쳐 주었다.
이 시에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망상도, 현실 비판이나 탄식도 들어있지 않다. 오직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만이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겸손하라거나, 사랑하라거나, 관용을 베풀라거나, 똑똑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나도 먹고살려고 그랬다'는 변명으로 자신의 천박함을 덮으려 들 때, 이 시를 읽어야 한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자본주의 정글의 법칙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이 시를 읽어야 한다.
시인이 소재 삼은 특정 국가, 국민, 인물(냉전시대 중립선언과 등거리 외교로 국민의 행복만을 위해 노력한 스웨덴 대통령 올로프 팔메)에 관하여 편견이라며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언어로서의 스칸디나비아인가 뭐라는 곳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하는 삶, 지성으로부터 출발한 철학이 깃든 사회, 자본주의 괴물이 아니라 인본주의와 보편이 살아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는 모습. 우리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버렸다.
비록 시시 때대로 흔들릴 지언정 우리는 사회의 도덕성, 철학, 그리고 역사를 되짚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저 권력자들의 뿌리는 어디로 부터 왔는지, 감언이설 뒤에는 무슨 음모가 도사리는지, 저 무도한 권력은 왜, 무엇을 위해 작동하는지... 시대정신이 메마른 사회에선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는 그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 2024년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