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그 번거로움이 주는 기쁨
얼어 죽을, 하이파이는 무슨...
말 그대로 불경기와 미니멀 트렌드에 밀려 얼어 죽어가는 국내 아날로그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 소수의 마니아들만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번거로운 손 조작을 고집하며, 크던 작던 자리를 차지하는 스테레오 스피커의 풍성함을 좋아한다. 디지털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굳이 시간을 내 앨범 디깅(Digging)을 나선다. 그건 보물 찾기니까. 나도 그렇다.
하이파이(Hi-Fi)는 높은 수준의 음질, 나아가 원음을 추구하는 음향기기를 말한다. 소리의 원본 그대로 귀에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른바 '오디오 쟁이'들의 삶이며, 낮춰 부르길 '돈 ㅈㄹ'이라 한다. 취미 수준을 넘어 광기를 부리는 이도 있고, 장비병에 걸려 바꿈질에 돈과 시간을 쓴다. 그런데 어쩌나, 그들은 매일 너무 행복하다. 나도 그랬다.
좋은 음악(音樂)과 좋은 음질(音質)은 다르다. 좋은 음질과 좋은 음색(音色) 또한 다른 범주다. 음악만 듣고 싶다면 아무 걸로나 들으면 된다. 형편없는 mp3든, 절망적인 블루투스든 신경 쓸 필요 없다. 세팅 없이 듣는 스트리밍이 소리의 절반도 못 들려준다는 사실은 노동요에서 힘을 얻고, 우울함을 치유하고, 기쁨을 배가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디오쟁이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음질에 집착한다. 스튜디오 혹은 라이브 현장에서 사운드 엔지니어와 프로듀서가 만들어낸 놀라운 사운드에 반한 것이다. 그 섬세한 악기의 배치와 믹싱의 조화는 영혼을 끄집어내 가상의 객석에 던져 넣는다. 좋아하는 연주자의 손 떨림, 가수들의 숨소리까지 듣고 싶다! 두근두근... 미친 거 맞다.
또한 음향기기 브랜드의 철학과 역사까지..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들이 악기의 탄생에 매료되는 것처럼 이야기에도 푹 빠져있다. 모든 걸 삼킨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좌우 스피커의 가운데, 귀 높이의 스위트 스폿(Sweet Spot)을 찾아 앉는다.
고음질을 경험하면 이제 '음색'이 들리기 시작한다. 일정 가격대를 넘으면 현재의 기술로 더 이상 '음질'을 좋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툼하다, 가볍다, 부드럽다. 화사하다...' 공학기계의 산출물에 불과한 음향에 온갖 주관적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들린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기계의 그래프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적인 세계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닫게 된다. 모든 튜닝의 끝은 순정이듯,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데 '돈 ㅈㄹ'은 필요 없었다는 것을.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반드시 최상급의 카메라가 필요하지 않듯,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데 한 덩이에 백만 원이 넘는 홍콩 침사추이의 말린 전복만이 답이 아니듯 말이다.
그때부턴 실용적으로 바뀐다. 저렴한 중고 오디오로도 감동은 몇 배가 된다. 낡은 LP판의 지직거림과 뭉툭한 소리가 오히려 가슴을 데워준다. 그 시절 한 땀 한 땀 써 내려간 음표를 이어 자르고 붙여 만들어낸 육성, 디자이너의 고뇌와 손맛이 느껴지는 앨범 재킷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이자 추억으로 와닿는다.
디지털 시대의 하이파이는 네트워크 플레이어(Network Player)가 대세다. 스마트폰처럼 서버에 접속해 음악을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받는다. 벅스, 스포티파이 등 같이 사용하는 앱의 음질은 서비스마다 다르지만 타이달(Tidal) 같은 경우 자체 마스터링 기술이 어찌나 완벽한지.. '역대급 소름 돋는 고음질'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나에게 더 큰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앱을 끈다. 용산에서 몇 시간을 뒤져 찾아낸 보물같은 LP를 턴테이블에 얹는다. 앨범 제목도, 몇 번째 곡인지도 직접 다가가야 알 수 있다. 뒤집고 먼지를 닦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번거로움이 좋다. 제로백 3.5초의 전기차 대신 자전거를 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람, 풍경, 시간, 추억이다.
너무 빨리 가지 않고, 허영에 취하지 않고,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고 싶을 땐
와이파이 말고 하이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