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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 스탁 May 12. 2023

[말] 처음 들어본 말

말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사장님이 이상한 걸 만들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오랜 지인 P로부터 클라이언트 한 분을 소개받았다. 유명한 축산시장에서 샵을 운영 중이신 사장님으로, 부모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35년 가업을 잇고 계신다. 예전에 한 번 스쳐가듯 뵈었을 뿐인데 중요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겨 주셨다.


내임 벨류가 있는 전통시장이고, 단골상권도 형성되어 있는 곳이지만 사장님에게는 '변화'가 절실하다 했다. 알아서 찾아와 주는 팬덤에 안주하기보다는 독자적 아이덴티티를 가진 브랜드로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흐름을 정확히 읽고 계신다. 여러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과정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거기선

처음 시도되는

특이한 공간


기획을 맡은 P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초기 산출물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자 '공간 프로젝트'도 맡아주십사 하신다. 한 때 카페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며 여러 매장을 만들어 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엔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뭘 만드신다는?'...


일이 몰릴 땐 노동강도가 높은 직종이라 직원들의 번 아웃(Burn Out)이 올 때가 있다. 그분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


'아.. 네 그런데 어디에?'


나는 매장 일부에 공간을 마련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별도의 조용한 공간을 임대할 예정이고, 거기 인테리어를 해달라 하신다.


사진은 이래도 현장은 쾌적하고 정말 아늑했다.


눈독 들이고 계시다는 은행 옆 아늑한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느꼈다. '아.. 사장님이 원하는 건 직원들이 진짜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원하시는구나'였다. 며칠 째 습도를 재고, 온도를 재고, 소음을 체크하신다. '아니, 이렇게 까지?' 오케이, 접수했다.


나의 콘셉트 촉이 발동했다. '사장님, 여긴 홍콩 영화 속 공간처럼 만들면 어떨까요?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지만 뭔가 판타지도 느껴지는 공간이요.' 너무 좋다며 여길 보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시다니 신기하다고 하신다. 나는 그곳을 단지 휴식이 아니라 에너지를 얻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졌다.


초기 스케치. 직원용 고오급 안마 의자를 배치 해달라신다. ⓒ Tony Stock


마침, 가게 단골 손님이 믿을만한 인테리어 소장님을 소개해 주셨다. 그런데 그분이 지방에 큰 공사를 앞두고 있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모든 콘셉트, 전달 사항을 시각화했다. 3D제작 단계에서 질감, 패턴, 자재를 이미 결정했고, 전원 스위치 종류까지 일일이 모두 지정하고 사진과 구매 링크를 달았다. 오류 없이 빠르게 수행하게 하는 방법이다


최종 결과물과 차이는 있지만 모든게 결정된 렌더링 ⓒ Tony Stock



손품 발품

같이 갑시다


온라인에서 구할 수 없는 인테리어 소품들은 직접 사장님과 P와 함께 다니며 현장에서 구매했다. 즉시 의사결정하기 위해서다. 동묘시장, 이태원, 을지로.. 발품, 손품을 팔았다. 득템의 나날이다.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서로 공간에 대한 이해도와 목적의식을 뚜렷이 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백남준 비디오아트를 보는 듯해서 들어간 매장.. 그런데 사장님이 정말 백남준 비디오아트 전문 수리를 하시는 분이셨다! ⓒ Tony Stock
한구석에서 득템 하는 기분이란 ⓒ Tony Stock
선택장애가 온다 ⓒ Tony Stock
선택장애? 보자마자 지름 ⓒ Tony Stock



처음 들어보는

클라이언트의 말


그러나 어떤 프로젝트든 돌발 변수는 생긴다. 문제들이 생기자 빠른 해결을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고, 체크하고, 그림을 그리고, 검색하고, 문자를 보낸다. 잠을 잘 시간이 없을 정도다. 사장님에게 매일의 리포팅을 할 때 문제점과 해결점을 명확히 하고 신속한 결정을 요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외의 말을 듣는다.



왜 그렇게 일정에 연연하세요?



'이사님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왜 그렇게 일정에 연연하세요?' 첨엔 나는 조금 섭섭했다. 일정준수야 말로 20년 디자인 생활에서 어겨본 적이 없는 내 긍지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 '저는 이사님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완성도가 좀 떨어져도 됩니다. 좀 늦게 만들어져도 돼요. 원하시면 저와 계속 계약하시고 오픈뒤에 보완하셔도 됩니다.'


'네... ㅠㅠ 대표님 너무 감사해요... 다만 저는 시간이 다 클라이언트의 비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정준수는 저의 기본 의무라 여깁니다. 그걸 못 지키는 건 용납이 안 돼요.'라고 대답했지만 그동안 받았던 모든 압박과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이런 말은 디자인을 하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다.


문제 없는 공사는 없다 ⓒ Tony Stock


그분은 결코 일에 느슨하거나, 낙천주의가 아니다. 매장 운영, 인력관리에 몹시 철저하며, 품질관리엔 목숨을 건다. 단골들의 팬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분은 다만 폭주기관차처럼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는 나의 엔진에 냉각수를 부어주신 거다. 진심을 담은 말이 지혜롭기까지 하다. 조심스레 꺼내신 다음 말은 나에게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맡기는 일은 시작은 있지만
끝나는 건 없는 걸로 해요.



하며 빙긋 웃으신다. 이 말은 오래오래 같이 일하자, 그리고 매번 너무 완벽한 결과를 내려고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뜻이라며 쑥스러워하신다. 그런다고 내가 대충 할 리도 없고, 일정을 늘리거나 지키지 않을 일도 없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사라질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즐거워질 수밖에.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의 철학을 반영한다. 삶의 태도와 그릇이 보인다. 타고난 성정이 직진인 내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한 이 경험은 많은 걸 느끼게 해 준다. 시작은 있지만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동행은 내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가장 큰 보람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한다.


직원들도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뭘 더 해주면 이들이 행복해질까?'

나는 어차피 또 발발거리고 바빠질 것 같다.






공간의 이름은 블루노트(Blue Note)라고 지었다.


블루노트는 재즈 음계의 하나로 온음계에서 3도, 5도, 7도를 각각 반음씩 내려 몽환적인고 나른한 음색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한다. 일상의 중간중간 반음을 내리고 여유를 갖자는 의미이다. 레트로한 콘셉트의 공간에 재즈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블루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컬러이기도 하다. 공간이 오픈하자 시장 상인들끼리 저 공간이 도대체 뭔지 서로 내기를 걸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석신공간프로젝트 #001. 블루노트 ⓒ Tony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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