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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Shin Apr 14. 2017

A급, 세션이 되어라 1

그레미,  그   영원한 우리의 꿈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꿈꿔왔던 그레미 수상 무대 서구 팝 시장의 중심인  헐리웃에서 상업적

예술적 가치와 인류문화에 기여한 척도를 종합하여 일 년에 한 번 그래머 폰수여하는 상으로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위너를 가리는 것인데 이것이 전 세계 팬들에게 축제와 같던 시절이 있었다

Grammy Awards
그레머폰 트로피

전미국 레코드 예술과학아카데미에서 음악성,예술성, 연주, 녹음 등 다양한 분야를 투표하여 

위너에게 수여하는 음반업계 최고 권위의 상이며 1957년 이래 매년 봄에 열리는데 최근에는 

코닥극장에서 매년 연속으로 아카데미상과 비슷한 권위로팝과 클래식,우수 레코드,앨범,가곡,

가수, 편곡, 녹음, 재킷 디자인 등 총 43개 부문에 걸쳐 시상한다.(Pop, Dance, Rock, R&B, Rap, Country,New Age,Jazz,Gospel,Latin, Blues,Folk,Reggae,World Music, 등)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계로는 조지프 한이 록 보컬상을 일본인은 뉴 에이지로 유명한 

기타로가 앨범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레미상 시상 부문에 있어

비영어권 분야에 많은 차별을 두는 보수적 아카데미라서 아시아에서 수상하려면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어 보인다. 우선은 빌보드 차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인 듯한데,

그 이유는 유튜브 등 무료 동영상 서비스로 인하여 전 세계에 음원 유통 보급이 넘쳐나고 일반 

마케팅을 벗어나 예측을 불허하다 보니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빌보드에서의 정책은 오래전부터 

상업적 영향력이 큰 선진 나라별 지역별장르를 세분화하여 상업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어지간하면, 빌보드 Top 10 순위 올리는 것이 아시아 가수도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역시 MTV 시상도 마찬가지로 권위는 폭발적 이지만 그레미 심사에 영향력을 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

유튜브의 모태 MTV
뮤직 비디오의 어머니

쉽게 말하자면, 세계 문화를 주름잡던 일본이 70,80년대 그레미 수상 내역이 많지 

않다는 것과 중국 영화가 2000년대 지배하여도 아카데미상이 쉽지 않은 것과,

그레미만큼은 물리적이지 않은 미국내 또 다른 문화라는 것과 프라이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빌보드 협회 경우에는 음반 판매량과 방송 횟수를 우선으로 하다 

보니 순위에 올라있는 나라별 차트를 따로 관리하여, 국내 정상급 아이돌의 앨범이 발매되면 

빌보드 아시아 부문 넘버에 쉽게 오른다. 다만, 이런 반복 현상이 보수적인 미국내에 세월이 

흘러 특별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레미내에서 라틴 음악에 버금가는 대우를 인정받아 

k-pop 공로상 같은 것이 따로 생길 여지는 있다. 어쨋든 작가의 꿈은 어려서 부터 미국에 진출

하여 성공을 하고 그레미상을 수상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누구나 뮤지션이 꿈인 사람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 음악 배우기에 참 어려웠던 시절 이었다.

유년시절, 작가는 본의 아니게 중학교에서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중퇴하고 음악을 배우러 클럽

취업을 하였는데 당시 클럽의 음악은 Top 40 Pop음악들을 그대로 카피하여  연주하는 곳 이었다

보통 200곡 정도는 있어야  변변한 B급 관광지나 지방무대라도 설 수가 있었다. 그렇게 13세부터 

시작한 카피 음악은 60,70년대 음악들을 위주로 팀 사운드를 맞춰 나가며 불과 2~3년 보컬 

생활을 한후 부터 기타란 악기의 테크니컬한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1,000곡 카피 시절
유명곡을 카피하라

이론을 배우고 있던 시기라서 매일 한 곡씩 작곡을 하는 습관과,

매일 새로 나온곡 들을 반복해 듣고 트랜스크립을 하며 기본적인 기타 테크닉작곡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유행처럼 가발을 쓰고 무대 위를 

연주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서울 근교 여러 곳에 오디션 요청으로 이어지며 당시에 금전적으로 

A급 대우를 해주던미 팔군 무대에 전속으로 서게 되었다.

미 8군 무대 시절
음악인의 산실

신중현 인순이를 비롯, 함춘호 최이철 빛과 소금 윤수일 등이 그때 80년 초 미 팔군에서 본 연주인이다.

기본적으로 1,000곡 이상의 pop 메모리와 초대 VIP손님들을 위한 즉흥 오부리 연주

팀 기본이 되어 있어야 했다. 오 부리=오 부리 카토의 일본식 준말이다

가라오케를 연상 시키지만 원래 이태리 말이다. 클래식 악보 중간 중간에 이 오부리 카토란 

표기가 되어 있으면 수석 연주자가 일어나 즉흥으로 작곡가의 의지를 읽고 해석하여

무난한 멜로디로 메워서 연주해 달라는 이야기다. 상상해 보면 이탈리아 가곡들 중간에 오부리

카토로 인해 단조로운 멜로디를 많이 순화, 변화시켰을것 같기도 한 해석의 의미 같다

즉흥 오부리카토
즉흥연주

흑인 사회에서는 오 부리가 바로 재즈이다. 매음굴에 놀러 가 술과 음식창기의 대접을 

받으려면 돈 많은 한량들의 반주와 신청곡을 즉흥으로 해 줘야 했다. 기생과 한량과 광대, 

그리고 술은 세월과 장소를 거스르지 않는 법이라 작가도 재즈를 매일 한곡씩 작곡함에 있어 

가난의 절박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 첫사랑은  그 당시에 얼마나 절박하고 가난한가?

전쟁 같은 가난은 뮤지션에 있어서 성공해서도 절대로 잊을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재즈는 가난으로 

기억되지 않고 오늘 창작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하나의 방편이 되고 있다.

현대음악 재즈
모든 음악의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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