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시 - 03

카드 만들기

by 토니샘

대학을 마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동부이촌동에서 화실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래되어서인지, 일상적인 일들이라 특별할 것이 없어서인지 다른 기억은 희미하지만, 예고 입학을 준비하는 중학생 소녀의 실기 지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겨울 방학을 시작하고 바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고 있던 터라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디자인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려고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를 함께 했었다.


당시 대학 입시던 예고 입시던 디자인 계열은 구성 시험을 보았다. 4절지 도화지에 주어진 주제의 형태를 면으로 구성해서 깨끗하게 색을 칠하는 시험이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왜 해야 하는지는 없어지고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가만 남은 참으로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역에 가까운 노동이었다.


나는 디자인이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카드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수제 카드로 만들어 보내거나 팔기도 하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충분히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은 기억나질 않지만 그 소녀도 매우 즐거워하며 함께 만들었다.


디자인은 먼저 계획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카드 제작 설계도(인쇄에서는 디자인 시방서라고 하기도 했다)를 그리도록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시범을 보여달라고 해서, 하나씩 그려가며 설명을 해 주었다.


머릿속에서 만들고 싶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스케치를 통해 이리저리 바꿔가며 점점 완성해 가는 방식을 바로 눈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텅 빈 종이 위에 차츰차츰 카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소녀는 매우 신기해하면서도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실제의 설계도로 만들어지는 것을 특히나 놀라워했다.


나도 즐거운 기억이어서 집에 돌아와서 그날 했던 수업을 한 장의 스케치로 다시 복기해 두었다가 나중에 친구와 만든 자작 시집인 "유고시편"에 '카드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수록해 두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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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시 시집을 꺼내 보다가 문뜩 이것을 실제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간단히 출력을 한 뒤에 조립해 보았더니 그럭저럭 카드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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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처럼 디자인 시방서를 따로 쓸 필요 없이 컴퓨터 툴을 이용해 원고를 만들고 데이터로 전송하면 바로 인쇄할 수 있는 시대다. 당시의 스케치를 데이터로 만들어 실제로 출력하고 조립해 보니, 30년 전 그날의 수업이 다시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텅 빈 종이 위에서 카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소녀가 느꼈을 신기함. 그것은 단순한 제작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마음이 보이는 형태가 되는 순간, 추상이 구체가 되는 그 변화를 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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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세계를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계를 형태와 색으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로 번역하는 이 일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나는 이것을 시각시라고 부르고 싶다.


시를 나누듯이 이 크리스마스 카드 디자인을 나누고 싶다. 감사와 따뜻함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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