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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커 Jan 27. 2023

정장을 입는다고 꼭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수요일의 해방일지 #9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졸업식은 자유 복장이었다. ‘차라리 교복을 입고 오라 하지’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나 더 해야 했다. 보통 우리 때(2009년)에는 졸업식날 정장을 입었다. 다들 졸업을 핑계로 정장을 한 벌 맞추곤 했던 것이다. 지나와 생각해 보면 이 시기의 정장은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 하지만, 그 시절 나에게는 보통의 유행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엄마와 함께 대백프라자 남성복 층으로 갔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디자인에, 택에 쓰인 브랜드명만 다른 정장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한 매장에서 검은색 정장 한 벌을 골랐다. 무난하게 좋은 날이나 슬픈 날이나 입을 수 있어 보였다. 그렇게 졸업을 했다. 이후 그 정장은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한 번 더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본격적으로 입사 서류를 제출했다. 정성껏 준비한 서류를 마감일 전에 보낸다. 어떤 곳은 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했고, 또 어떤 곳은 개인적인 피드백까지 정성스럽게 남겨주었다. 수업 중에도, 조별 회의 중에도, 시험공부 중에도, 휴대폰은 늘 눈에 띄는 곳에 두었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내적 환호를 외쳤다. 첫 면접 일정이 잡힌 날, 아빠와 함께 대구의 어느 골목으로 갔다. 골목에는 중저가 정장 브랜드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수개월 전 형이 정장을 샀던 곳으로 갔다. 입구를 들어서기도 전에 마음을 굳혔다. 여기선 사지 않을 거라고. 형은 공무원이다. 공무원 면접을 볼 때 입었던 정장을, 광고 회사, 그것도 카피라이터 면접을 볼 때 입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브랜드의 모델은 신화였다. 언제적 신화인가. 정장을 맞춰 입고 여섯 멤버가 나란히 선 모습은 마치 스마트(No.1 교복 브랜드)를 연상시켰다. 일단 입어는 봐야 했다. 핏이 너무 헐렁?했다. 이미 마음도 헐렁했기 때문에 좀 더 둘러보고 온다는 다시 없을 인사말과 함께 서둘러 매장을 나왔다. 사실 미리 봐둔 브랜드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여태껏 아빠의 말에 순응하며 따라다녔던 것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 랄까. 매장 입구부터 느낌(보다는 기분)이 달랐다. 모델은 김수현이었다. (그 시절 김수현은 별.그.대로 대스타가 되었다) 8만 원 더 비싼 모델과 8만 원 덜 비싼 모델, 두 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을 하는 쪽은 아빠였고, 나는 고민 없이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8만 원 더 비싼 모델을 입어 보다가… “아드님은 저 모델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원하는 걸로 사 주시죠~” 그 뒤, 아빠의 머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만히 있지. 어차피 고집으로 이길 싸움인데, 왜 나서서 사람 마음 찡하게 만드는지. 덕분에 첫 월급을 타고, 꼭 아빠에겐 정장을 사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혼을 하기 전엔 꼭 거쳐야 하는 몇 가지 절차가 있다. 거의 대부분은 희진이를 위한 일인데, 딱 하나 정장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사실, 결혼식을 가서 ‘와~ 저 신랑 정장 엄청 화려하다~, 예쁘다~, 멋있다~’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정장 또한 웨딩드레스 옆에서 너무 모자라지도, 또 너무 튀지도 않게 신부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인생 첫 맞춤 정장을 샀다. 무난한 디자인의 무난한 컬러로. 특별한 날이 있을 땐 항상 그 옷을 입었다. 친구의 결혼식, 친인척의 장례식, 이직을 위한 면접. 잊을 만하면 꺼내 입게 되는 정장 덕분에, 내 몸은 때때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장을 맞출 때의 내 몸은 일생 최저점이었고, 신혼생활을 이어가면서는 때때로 최고점을 보곤 했으니까. 이래서 결혼을 할 때는 맞춤 정장을 사나보다. 때때로 긴장하며 그날의 몸을, 마음을, 정신을 되뇌며 살아가라고.


나에게 정장은 어른의 전유물 같은 거다. 성인이 될 때, 취업을 할 때, 결혼을 할 때, 이제껏 나는 총 세 벌의 정장을 샀다. 그때마다 어른이 된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속 크고 작은 다짐은 한 번씩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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