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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커 Feb 17. 2023

딴짓 아니고, 워밍업

수요일의 해방일지 #12

핫! 둘! 셋! 넷! 다~쓰! 여~쓰! 일고~ 여덜!

둘! 둘! 셋! 넷! 다~쓰! 여~쓰! 일고~ 여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9년 동안 태권도를 배웠다. 태권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준비운동, 바로 워밍업이라고 배웠다. 워밍업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하기 전, 차갑게 긴장된 몸에 살짝 열이 날 정도로만 몸을 푸는 행위를 뜻한다. 25년 전, 조기 교육이 잘 된 탓에 지금도 나는 늘 워밍업을 중요시한다.


책상에 앉으면 자리 정돈부터 한다. 일종의 공부 전의 워밍업. 책상을 잘 쓰지 않던 학생이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워밍업에 좀 더 오래 걸렸다. N년차 직장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출근하면 자리부터 정돈하고 일을 시작한다. 특히 월요일에는 좀 더 신경 써서. 분명 어제 퇴근길에 가지런히 놓아둔 것 같은 책, 노트, 펜, 텀블러가 아침이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지난밤 내 책상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토이스토리가 실재하는 건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날. 혹은, 일을 잘 해야 하는 날. 또 혹은 일 잘하는 누군가를 보고 나 또한 그러고 싶은 날. 그런 날에는 일과 관련된 책을 꺼내 출근한다. 아침이 바쁜 탓에 책을 챙기지 못했다면 모티비(모베러웍스의 유튜브 채널)를 본다. 내가 하는 일과 같은/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유독 일하기를 좋아하는, 그러면서 또 잘하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내 일을 한 뼘 정도 더 좋아하게 된다. 그러면서 또 나 또한 일을 잘하고 싶어진다. 간절히 바라면, 한 뼘..까진 아니더라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정도는 일을 잘하게 되는 마법에 걸린 듯한 착각에 든다. 아마도 워밍업이 잘 된 탓일 것이다.


내 인생 첫 소개팅은 스물여섯 때였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받았고, 카톡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안녕하세요?” 만나기도 전에 벌써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첫 만남’ 전 충분한 워밍업을 가졌다. 드디어 처음 만나는 날.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마침 장소가 청계천 바로 부근이라는 이유로 한 시간 정도 미리 갔다. 혼자서 청계천을 걸으며, 곧 닥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색함과 긴장감에 대한 워밍업을 했다. 일주일 정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연애’에 대한 워밍업을 한 후,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같은 결의 워밍업 시간을 갖고, 우리는 남은 일생을 동반하기로 했다.


희진과 나를 소개해 준 나의 형(피보다 진한 물과 같은 군대 선임)과 희진의 선배(작은 태움이라도 있었다면 관계 또한 재로 남았을 선배)는 쌍둥이를 낳았다. 이듬해 희진과 나는 이안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태어나고 이안이가 희진의 뱃속에서 존재할 때, 우리는 자주(거의 매 주말) 형과 누나를 만났다. 우리가 만난 인간은 형과 누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윤이와 시윤이는 내가 본 가장 작은 인간이었다. 눈으로만 봐도 감히 조심스러운 이 작은 인간들을 안아 봤다. 심지어 안아서 재우기도 해봤다. 심심지어 분유도 먹여봤다. 심심심지어 트림도 시켜봤다. 처음부터 계획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 경험은 약 11개월 뒤, 내 생애 가장 쓸모 있는 워밍업이 되었다.


핫! 둘! 셋! 넷! 다~쓰! 여~쓰! 일고~ 여덜!


생의 본 운동이 힘들어질수록 워밍업을 더 중요시한다. 차갑게 긴장된 몸과 마음에 살짝 열이 날 정도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데 그만한 게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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