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해방일지 #1
누군가 직업을 물어본다면, 나는 브랜딩 기획자 혹은 브랜드경험 기획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으쓱 하겠지. 나는 내 직업을 좋아하고, 또 자랑스러워한다. 내 직업은 항상 멋졌다. ‘카피라이터’ ‘브랜드 마케터’ ‘브랜딩 기획자’ (가끔은 나보다 조금 더 멋진 내 직업 뒤에 숨는 경우도 있다)
사실 회사에서 정확한 내 포지션은 BX팀 소속의 브랜드 기획자다. (입사 지원할 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나는 브랜드를 기획하지 않는다. 브랜딩을 기획하지. 브랜드와 브랜딩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브랜드를 기획하는 일이 아니라, 브랜드를 마주할 고객들의 경험을 기획하는 일이다. 브랜딩을 하는 브랜드는 멈춰 있지 않고 살아 숨쉬면서 계속해서 고객에게 경험을 줄 것이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그래서 Ing가 붙는다. 또 그래서 브랜드에는 일 잘하는 브랜딩 기획자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경험을 기획한다는 일이 멋진 일이다. 그 멋진 일을 내가 하고 있다니, 영광이다.
나는 지금까지 총 세 가지의 직업을 가져왔다.
8년 전 이맘 때에는 ‘카피라이터’라고 적힌 명함이 꼭 갖고 싶었다. 다름아닌 ‘카피라이터의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일이 명확하게 어떤 일인지도 몰랐으면서. 아무튼 그래서 서류 지원도 엄청 많이 하고, 면접도 꽤 많이 본 편이다. 대략 30군데 정도의 회사에 서류를 넣고, 10군데 정도 면접을 보고, 딱 한 군데에 합격했다. (정말 다행인 건 합격한 회사가 면접 본 곳 중 가장 크고 회사 다운 회사였다는 거다) 그렇게 3년을 일하고 이직을 했다. 이직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결혼한 지 5개월이 된 아내가 “이렇게 매일 밤 늦게 오고, 같이 산책도 못할 것 같으면 너는 왜 결혼을 했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던 내가 “내 일은 내가 결정 할게”라고 말대꾸까지 했다. 그러고는 아차 싶어 이직을 준비했다. 사실 이직을 준비할 때만 해도 카피라이터 외에 다른 직업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몇 군데 서류를 써서 냈는데 서류에서 모두 탈락했다. 사실 경력직 카피라이터로 입사하려면 다른 경력직 카피라이터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나는 그들처럼 포트폴리오가 화려하거나, 통찰력이 깊거나, 내공이 있거나 하지 못했다. 그러다 스타트업의 ‘브랜드 마케터’라는 포지션이 눈에 들어왔고,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지원했다. (참고로 ‘카피라이터’와 ‘브랜드 마케터’는 아주아주 다르다. 둘다 멋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그렇게 브랜드 마케팅을 시작했다. 또 운이 좋았던 건, 내가 입사한 곳은 1세대 스타트업으로 업력이 꽤 많고 업계 1등이라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어디어디의 브랜드 마케터입니다.” 하면 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곳에서 2년을 일하고, 회사에는 정이 좀 떨어졌지만(그럴만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내 직업은 여전히 멋지다고 생각했고, 다음 회사도 여전히 같은 포지션으로 옮겼다. 지금 회사로 옮기기 전에는 정말 면접을 많이 봤다. 업계의 이름있는 회사들의 브랜드 마케팅팀 팀장님들은 모두 만나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걸로도 참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좌절과 좌절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지금 회사의 JD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마케터’가 아닌 내 직업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답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내가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면서 브랜딩과 마케팅 중 브랜딩에 더 중점을 두며 일했다고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또 브랜딩을 더 일로써 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브랜드 마케터나 브랜드 기획자나 크게 차이를 두지 않았고, 오히려 브랜딩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브랜딩 기획자로 일한 지 이제 겨우 2개월이 지났고, 아직은 그때의 내 결정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더 오래 두고 지켜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