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는 우리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논리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공평한 거래여야만 성립 가능한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른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다. 경제학이란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학문이다.
내가 갖지 못한 면을 가진 친구로부터 나의 결핍된 면을 충족시키고, 나를 채워줄 지혜를 가진 사람들과 모임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며, 함께 있을 때 즐거움과 치유를 선사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돈을 쓴다. 필연적으로 한쪽만 주고 다른 쪽만 받는 무조건적인 일방통행의 관계는 우연히 시작될지언정 지속되기 힘들다.
하물며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착관계는 어떠한가. 안 그런 척하면서 한층 더 지독하게 저울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현실계의 에누리 따위는 통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호구들의 세계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수상할 정도로 논리적이지 않다. 시장경제에서는 생태계 교란자다. 저울의 무게추가 평균값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일부러 속아주기도 하고, 거래조건이 전혀 맞지 않는데도 쿨거래를 진행한다.
실제로 눈에 보이거나 체감할 수 있는 가치 외에 다양한 것들이 매물로 나오는 인간들 사이의 거래는 호구들에게 꽤나 만족감을 준다.
그들이 주로 주고받는 것은 바로 <존재의 이유>,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그게 바로 호구의 사랑이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2024
부모라는 보호막이 없었던 영미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게 습성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자기주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를 모르는 영미는 어른이지만 자립하지 못한, 타인을 어시스트하며 살아가는, 자기의 존재가 희미한 사람이었다.
그 반대편에 서있는 것 같은 유진은 자신의 욕구를 알고 스스로 결정하고 취향이 확고하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호구라기 보단 갑질에 적합할 것 같지만 정작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립할 수 없는 비자발적 호구.
등장인물마다 호구 파티,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호구 잡는 의도치 않은 호구사슬의 연속이었지만, 그 와중에 악의는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는 행복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내가 좋아하는 류의 호구를 위한 호구영화였다.
알고 보면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위에 흔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보면"이라는 과정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매우 힘들고 고단하고 마음을 써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자발적 호구의 단계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이후 편협하고 경직된 자세로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일반적인 호구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 호구들 중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에 - 좋은 스승을 만나거나, 좋은 호구를 만났을 때, 혹은 지지부진한 순수호구의 길을 지나 외상 후 성장의 단계를 거쳐 자발적 호구의 단계에 들어서면 그제야 피해자의식에서 벗어나 고차원의 호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