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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ONY Mar 17. 2024

호구의고백

호구에게 사랑은 존재론적인 문제다


그 사람과와의 관계를 마치고 나서 내 머릿속은 마치 치열한 대국이 끝난 뒤 복기하는 바둑기사의 손처럼 바빴다. 내가 내린 판단과 분석과 결론에 대해 적당하고 적절한 이유에 대해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는 행위를 마라톤처럼 반복했고 꿈과 몽상과 의식의 표면 아래를 훑어 내려가는 비현실의 시간을 보냈다. 마치 수면과 바다의 밑바닥을 오가는 물질을 무한반복하는 해녀가 된 것 같았다능력치보다 깊은 숨을 참고 침잠해 내는 은 일종의 목숨을 건 고행 아니면 자해같았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 참담한 행동이었다.

그리하여 그 깊은 바다에서 귀한 진주 같은 농축된 사실 하나를 채취했다.

나는 아끼사람과 함께할 시간이 영원히 없어져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니었다. 더이상 사랑받지 못해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열정을 쏟아내고 그보다 더 귀한 나의 보석처럼 찬란하고 예쁜 감정들을 건네주었던 지난 시간들이 보답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내 깊은 불안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가치롭지 못할까 봐 항상 불안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의 증명으로서 타인에게 비친 나를 바라본다, 마치 나르시시스트 신화에 나오는 요정 에코처럼. 스스로 존재해 내는 것이 아직도 버거웠던 것이다.

내 인생 전반에는 항상 잔잔하고 미세한 불안이 깔려있었다.
수없이 노력했지만 나는 그걸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끈질기게 불안과 헤어지려고 치료하고 공부하고 수련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걸 버릴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불안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자라는 영역에 확고히 자리 잡은 불안은 사실상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평생 동안 그래왔듯이 나는 내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지금의 나를 이루어왔으므로 불안을 거부하는 것은 내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방식으로 나는 불안하고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영혼으로 끊임없이 중심을 잡고 흔들리면서 살아간다. 그건 마치 커다란 공위에서 균형 잡기를 하는 삐에로같은 느낌이다.

나에게 가치를 증명해 주는 투영으로서 누군가가 내 앞에 실존해야만 했다. 나는 타인의 의식 안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느껴야만 했고 사랑을 쏟아내는 일이, 아니 내 사랑의 퍼부음을 받을 대상으로서 상대를 가치롭게 만드는 일이 내 존재를 증명해 내는 방법이었다.
나는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가치로웠고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서 그는 나를 언제나 항상 기억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일상에서, 그의 머릿속에서 내가 증발해 버린 사건은 내 시스템 상으로는 머릿속이 뒤집어질만한 비상상황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상하네 대체 왜 거기에 내가 없을까. 아, 처음부터 없었던 걸 내가 착각했던 게 분명해.
내가 생존해 온 방식으로서의 부정과 회피라는 방어시스템이 풀가동하였고 내 유약한 내면이 상처받지 않도록 피신시켰다. 그렇게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부존재하던 사람이 되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그리고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의 조급함과 두려움이 나 자신을 그르쳤고 누가 뭐래도 그건 확실히 나의 잘못이다. 네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꼭 말해줘야만 했었다.

사실 이건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백이다. 
나는 정식으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두려움과 불안이 잔뜩 게재된 관계는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설익고 모자라며, 이기적이다. 그리고 깊은 무의식에서  끌어올린 불안이 개재된 그 감정을 알아차린 이후에야 사랑이란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단순히 호르몬의 분비에서 나오는 반응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합동노력이라는 전제하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인지한 후의 사랑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과는 확실히 다를 예정이니까.


불행히도 내가 진정으로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하고 조급한 내가 누군가를 충분히 아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두렵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나서 함께 노력해 보자고 제안할 예정이었다. 삶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아직 기회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든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완벽주의와 염세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요소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차하면 좋은 동지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함께 살아낼 사람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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