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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ONY Mar 26. 2024

최선의호구

관계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나는 물었다.

최선을 다했어?
분명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변명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세세하게 뭔가 많았어.

그래? 그러고 나서 한참 후에 나는 생각을 해내려고 애썼다. 
아 그런가? 
내가 원하는 대답을 말해달라고 하면 가 바로 해주던 것도,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자잘한 것들 기억했던 것도, 내가 해준 것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고마워한 것도, 내가 좋아하는 낯설기만 한 곳들을 함께 다녀 준 것도, 최선을 다해 되지도 않는 어색한 리액션을 해준 것도, 그래도 내가 받고 싶었던 표현 한 번쯤은 해주려 시도했던 것도 , 내가 시비 거는 거 말싸움 거는 거 다 받아주려 했던 것도 어쩌면 엄청난 노력이었을 수 있겠다.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너도 나를 위해 뭔가 하고 있었구나. 다시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흙탕물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고, 나는 그 이유를 아주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은 시절에 따라 갈리기도 하고 대부분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기에, 최선을 다하고 나서도 내가 원하는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나를 집어삼키는 공허함과 슬픔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알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발을 빼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바늘구멍만 한 통로로 소통하는 걸 나는 살면서 수도 없이 봐왔고 늘 안타까웠다.
흔들리는 걸 두려워하는 네가 그걸 감당하기는 싫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너와 다르게 나는 최선을 넘어서 무리했다.
그건 단순히 우리의 관계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렇게 했고 내가 나를 잠시 잃어버린 그 시간 동안 네 마음의 무거운 부분이 잠깐 가벼워지고 편안했다면 내 1차 목표는 이루어졌으므로 그걸로 일단은 됐다.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걸려 자빠지긴 했지만 호구로서의 체면은 겨우 유지했던 것이다.

호구는 항상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사실 연인관계뿐만 아니라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는 자연과 우주까지도 진심으로 대한다)
세간에서는 이런 호구의 사랑이 어리숙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20대 초중반에나 할 법한 소위 모든 걸 거는 사랑의 방식이란 보기에 따라 미성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다.
고차원의 호구들은 생각보다 강하고 현명하다.
사람들이 상처받고 나서 두려워하며 몸을 숨기는 방어기제를 작동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으로 나와 손을 내미는 역할을 자처한다.
계산대 위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그 힘이 훨씬 커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상처받거나 배신당하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당연하고 흔하디 흔하게 일어나는 인간관계에서의 일들이 나를 인색하고 쓸쓸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내 호구력에 영향을 주는 일이다.

호구는 항상 현명하게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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