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반성

by 투스

명절이 주는 여백이 태풍 속의 눈처럼 어색하다. 한창 바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널브러져 TV를 보는 시간이 주어지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방황하게 된다. 이럴 때는 환자들 생각이 여파처럼 몰려온다. 대부분은 반성이다.


처음 진료를 시작했을 때는 우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과 집중을 쏟았다. 아이의 호흡을 관찰하며 맞춰가려고 했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은 환자가 많아진 탓도 있겠지만,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려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저 입을 억지로 벌려 진료를 하는 셈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기술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치과대학 학생이나 치위생과 학생들이 처음 실습에 들어왔을 때, 내가 건조하게 진료만 하면 아이에게 저렇게 차갑게 대하다니 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새삼 내가 아이들의 울음에 익숙함을 넘어 당연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아는 댄서분이 말하길, 춤을 못 추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인과는 다른 빠져드는 아우라’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치과의사도 마찬가지다. 치료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소아청소년치과라면 ‘얼굴만 봐도 치료되는 듯한 아우라’가 필요하다. 입구부터 이 선생님은 나를 살살 다뤄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건 생각보다 미묘하고 깊이 있는 부분이다. 이 아우라는 원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아이들은 속지 않는다. 감각이 깨어나야 감성이 열리고, 감성이 열려야 신성, 즉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상태가 열린다고 한다. 그게 이런 아우라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치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가빠진 호흡, 뒷걸음질, 손을 꼭 쥐는 모습 같은 작은 변화들을 시시각각 감각해야 한다. 그러면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렇게 되면 나 역시 아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진료를 잠깐 멈췄다가 재개하며 자연스럽게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말로 타이르는 것은 효과가 별로 없다. 아무리 친절하게 잘 말해도 결국에는 “그러니까 잘 참아야 해”라는 억누르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서로 함께 느끼고 있다는 교감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에는 엄청난 집중력과 심력이 소모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아도 치료를 마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심력을 쓰지 않게 되었다. 오랜 수련 생활에 지쳐버린 것인지, 아니면 울음소리에 무뎌져 심력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명절,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정주행 하면서 냉철함을 기르는 동시에 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기술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성경도 읽고, <사색>이라는 철학 잡지도 읽으며 명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마음의 주유소 같은 레지던트가 되고 싶었지만, 최근 들어 나태해졌다. 그래서 매일 먹어도 배가 고팠던 것 같다. 뿌듯하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다. 이제 마음의 양식을 다시 챙겨 먹고, 주변에 좋은 기운을 전하며 아이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신성을 지켜나가야겠다. 다시금 포만감을 느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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