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라고 묻는 영화들

by 신지승

며칠 동안 의도치 않게 일본 영화, 드라마,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몇 편을 본 것 같다.

두 어린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맘의 일드 '우먼', 젊었을 때 사회주의자였던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헤어졌던 첫사랑을 찾아 영국과 일본을 혼자 여행하며 한 일본 여자와의 사랑의 비밀을 파헤치는 '터치',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7년간의 작업 과정을 담은 다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우먼'은 11부작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남편의 갑작스러운 지하철 사고사로 문을 연다. '터치'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라는 역사적 죽음과 공포를 서사의 배경으로 깔고, 하야오의 다큐는 함께 일했던 동료와 선배들의 죽음을 곳곳에 배치해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세 작품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물론 죽음이나 폭력이 없는 영화는 거의 없다. 우리 일상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객을 붙들어두는 가장 오래된 장치다. 최근 내가 본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암으로 떠나야 하는 젊은 아내가 딸에게 도전하는 엄마로 기억되기 위해 유럽 셰프 대회에 나가는 '위 리브 인 타임', 난독증이 있는 소녀를 대신해 시를 써주던 소년이 시한부 삶을 살다 가는 그녀의 노래를 이어가는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 하나같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결국 이 영화들은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멋진 죽음을. 드라마틱한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삶은 얕다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평범하게 살다 죽는 삶은 서사가 되지 않는다고.

물론 아주 오랫동안 상업 영화들이 관객에게 모종의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드라마틱한 강박'이 오히려 평범한 이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나릇한 오후의 가치를 지워버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극장과 넷플릭스를 딛고 있는 작가들은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


감동을 가장 손쉽게 조달할 수 있는 원료가 시한부 인생, 죽음, 고립 같은 것들뿐이라는 듯, 너무 평이하게, 너무 습관적으로 그것들을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고령화와 양극화와 개인화라는 시대의 장벽 앞에서, 창작자들 스스로 다른 원료를 찾는 일을 포기하도록 창작의 시쓰템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게 끝까지 남은 것은 정작 그 작품 속 죽음들만 아니었다.

'우먼'에서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새 남자에게로 가버린 증오스러운 친모의, 그 작고 정갈한 마당 정원이었다.

하야오의 다큐에서는 프로듀서가 거금을 들여 동네 아이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잔디 운동장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창작의 원료로 삼는 하야오의 오랜 습관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는데, 정작 그 운동장에 아이들이 등장한 것은 예닐곱 명이 야구를 하는 단 한 장면뿐이었다. 그 빈 운동장이 내내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하야오의 '기획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구석이 무척 많다.


'우먼'의 정원은 우리 집 마당과 비슷한 크기인데도 저토록 야무지게 가꾸어진 마당 정원에 자극을 받았다. 화분 몇 개뿐인 내 마당도 저렇게 만들어볼까. 오래된 막다른 골목을 구획한 담을 허물고 누구든 찾아와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볼까?

또 하나는 넷플릭스영화'터치'에서 본 '하이쿠'이다 .

일종의 우리의 시조보다는 더 자유롭고 더 평민의 공동체 로 확장된 , 시를 가지고 노는 공동체 놀이가 된 하이쿠는 낮은 계층까지 번진 인문 놀이일 것이다 . 낮은 바닥으로 와서 응결되는 예술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의 삶이며 예술의 드라마틱한 죽음일것이다 . 여전히 만드는자, 보는자가 구별되어 있는 서사의 영역,유튜브가 개척시킨 개인 공간의 소비 놀이를 벗어나 연결의 마당놀이인 하이쿠가 부러웠다.(하이쿠는 혼자 짓지만 여백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렌가(連歌)는 여럿이 짓지만 각 연은 독립적으로 완결된다. 둘 다 결국 타인과의 연결을 전제로 한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마을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만들고 연기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죽음도, 폭력도, 갈등도 없는 일상의 서사. 그것이 내 숙제였고 즐거움이었다. 어떻게 웃으며 놀 것인가를 붙들고 씨름하는 일.간혹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도 어설픈 생을 찬양할수 있다

그런데 나조차 그 작업이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선뜻 말하지 못한다는 걸,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결국 나도 그 강박 안에 있었다. 드라마틱하지 않은 삶은 얕다는 그 오래된 협박에서, 나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평범한 오후, 마당의 화분 하나를 옮기는 일. 담 하나를 허물어 이웃에게 문을 여는 일에서 그 마을의 삶들과 연결되는. 그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자기 삶을 꾸려가는 지극히 구체적인 서사의 시작이며 엔딩이다. 죽음 없이도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나는 그걸 증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극장에서는 하야오의 다큐처럼 3명의 관객들만 지켜보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는 잊히지 않는 축제였다. 요사이 영화를 보면 볼수록 여전히 평범한 삶의 축제로서의 영화를 포기할 수 없다. 어울려 웃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함께 즐겁게 연기하며 지역의 서사를 남길 것인가를 찾는 영화는 '지금 여기'와 더불어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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