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cm'와 '우리는 매일매일'의 韓日戰

소나기와 여로의 감각을 계숭하다

by 신지승


새 학기를 맞이한 딸아이는 같은 반이 된 새 친구에게 인스를 보냈단다. 나랑 친구 하자고. 그 풋풋한 시간을 옆에서 보면서 교복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 학창 시절의 영화관을 먼저 떠올린다. 당시 극장에는 청소년 관람가 영화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얄개전 같은 영화를 찾아 몰렸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등장하고, 장난과 소동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또래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물론 그것은 내가 보내고 있던 학창생활과는 전혀 다른 영화적 캐릭터에 의해 시대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리얼리즘적인 학창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흥미를 위해 종횡무진하는 주인공의 무대를 관객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중·고등학생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면, 나는 그것이 이 세대의 감정 구조를 보여 줄 수 있을지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일말의 시대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중·고등학생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기도 숏폼을 만들어 업로드하기도 한다. 스마트폰 하나로 촬영하고 편집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기술적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자유로운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끔 묻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영상 속에서 우리는 정말로 그 또래의 감정 구조를 읽을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품의 서사와 감성을 반복하고 있을 뿐일까.


한국의 '우리는 매일매일'과 일본의 '초속 5cm' 두 편의 영화를 일주일 사이에 보기로 했다. 물론 이건 한국과 일본을 대표할 수 없는 것이다 . 동시간에 내가 볼 수 있었던 작품일 뿐이지만 영화로서는 이미 일본의 완벽한 승리다.

이미 귀신같은 입소문은 ' 우리는 매일매일'은 나를 포함해 단 5명의 관객뿐이었다 , 연기나 연출면에선 거의 평가를 하지 못할 정도로 뻣뻣함의 연기와 경직된 연출 수준으로 꿈에 나올까 두렵다.


그래서 일단 서사구조만으로 비교해 본다면

한국의 '우리는 매일매일'은 웹툰을 원작으로 한 한국의 학원 로맨스였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날, 소꿉친구가 갑자기 고백하고, 여학생은 단칼에 거절한다.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나면서 어색한 관계가 이어지고, 홧김에 또 다른 고백이 이루어진다. 감정은 계속해서 사건을 낳고, 사건은 또 다른 감정을 만든다.

이 서사의 구조는 단순하다. 고백. 거절. 오해. 질투. 또 다른 고백. 등장인물은 이성에 대한 감정외에는 어떤 꿈도 형이상학적 축적도 없다.

관계는 계속 흔들리지만,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감정은 축적되기보다 사건을 통해 즉시 표출된다. 마음속에서 오래 숙성되는 감정은 한 번도 없다 관계 속에서 농부공처럼 통통 빠르게 튀어 다닌다.

웹툰 서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이다. 플랫폼은 매주 새로운 장면을 요구하고, 이야기는 그 요구에 맞춰 사건을 만들어 낸다. 감정은 시간 속에서 깊어지기보다, 사건 속에서 빠르게 이동한다. 많이 찾는 웹툰은 소재거리 찾는 영화인들에 의해 바로 영화화된다

반면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 거의 한국적 감성과는 대립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정은 거의 사건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풍경이 있다. 우주 ,행성 ,지구의 종말 ,거리, 기차, 눈, 그리고 벚꽃. 두 인물은 서로를 좋아하지만, 그 감정은 대부분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기차가 늦어지고, 눈이 내리고, 시간이 지나간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풍경 속에 남는다.

이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한국 문학의 오래된 작품 하나가 떠오른다. 황순원의 「소나기」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흐르고, 두 아이의 감정은 자연의 리듬 속에서 조용히 드러난다. 어쩌면 초속 5센티미터는 '소나기' 그 이후의 버전을 완벽하게 구현시켰다. 우리는 더 이상 소나기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하는데 일본은 한국의 문학을 다시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서사, 감정 구조는 일본 문학의 전통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고독, 섬세한 감각, 그리고 시간 감각까지.

사실 남녀 간의 감정은 고백을 통해 시작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다가오는지 그 설렘은 당사자들만 안다. 고백은 그야말로 그 설렘의 화룡점정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웹툰 작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남용하고 있다 깊은 내면의 감정들을 삭혀 보지 못한 세대들의 사건적 상상은 우리 문화를 얼마나 삭막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초속 5센티'에서 두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다. 우리 세대가 초등학교 때 kbs 드라마 '여로'에서 이미 경험한 서사였다.

그 사이에서 감정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벚꽃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것은 문화의 우열이다. 서사를 만들어 내는 투기산업 구조로 인해 문화구조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작가 중심의 창작 환경 속에서 발전해 왔다. 개인의 감정과 시간을 길게 관찰하는 서사가 가능했다. 반면 한국의 청춘 서사는 웹툰과 드라마라는 플랫폼 속에서 빠르게 소비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관계와 사건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두 영화의 차이에서 발견되는 것은 문화상품을 통해 대중을 공감시키려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한 영화에서는 사랑이 벚꽃처럼 떨어진다. 천천히,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다른 영화에서는 사랑이 농구공처럼 퉁퉁거린다.. 고백이 던져지고, 거절이 되돌아오고, 거절을 해도 또 덤벼든다. 또 다른 감정이 이어진다. 은근히 남성적 공격주의가 남학생과 여학생 구별 없이 휘두르고 있음이 보인다.'꿩 잡는 게 매다'식의 성공중심적 문화도 엿보인다 물론 그것은 작가들의 감각일 뿐이다. 우리 시대나 지금에도 결국 일상과 학창의 공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연애감정을 그냥 학교와 어린 학생들에게 팔아먹기 위해 성인이 된 연기자들에게 학생 교복을 입힌 것뿐이다

연기자들도 깊이 있는 작품을 통해 정신적 근육이 만들어진다면 축복일 것이다

연기자 김새론의 마지막 작품이 이런 수준 작품이 아니었다면 죽고 나서도 다시 잠깐이리도 의미 있는 대중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두 작품을 통해 한국의 문화상품 생산구조에 의해 훈습된 한국 대중들의 얕은 집단 문화의식을 뜻밖에 되돌아보기도 했다.

우리 딸에게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미 어설픈 연애 감정으로만으로 고백과 거절이 연쇄되는 속도 속에서 풋풋한 학창과 젊음을 소비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일본영화는 그 감성과 인문학적 뿌리가 우리와는 달리 내면적으로 향하는 상품을 만들어 내려하니 비록 극장수나 관객수로 견주지 못할, 미래의 힘이 있다는 걸 확인하였다. 중앙의 투기적 세력들과 다르게 각 지역단위에서 자본회수의 강박을 벗은 창작자들, 관객들을 키울 창작적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외는 일본을 이길(?) 문화예술적 전통을 만들 대안이 없다 .영화는 분명히 글로벌 문화 자산이면서도, 그 서사의 리듬과 감정의 구조에는 여전히 국가적 생산 환경과 문화적 성향이 깊이 각인되어 있어 서로 다른 문화적 개성과 창작 전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서사를 조직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는 그러한 개성과 전통 또한 일정한 방향으로 길들여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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