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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에서 시작된 임란의 상상

동물의 밤은 사람의 낮보다 70분 2024 부산국제동물영화제 초청

by 신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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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 그림에서 시작된 사유

부산 범일동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본 한 그림. 그것은 누군가가 클로드 모네의 〈산책, 양산을 쓴 여인〉을 서툴게 모사한 그림이었다. 원작이 겨우 떠오를 정도의 어설픈 모작이었지만, 내 속에서는 수많은 상상이 북새통처럼 떠오르는 소란통으로 바뀐다. 모네의 지극한 가난이 떠올랐다. 당시 모네는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모델을 구할 여력이 없어 아내와 아들을 작품 속 주인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는 원래 모델로 만났기에 굳이 다른 모델을 구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모네의 가난이 연상시킨 비극적 역사: 우키요에와 조선 도공

모네의 가난. 그것은 무수한 연상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 그림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영감을 받은 일본 우키요에 풍속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우키요에의 판화 종이들이 과거 도자기의 포장지로 쓰였다는 사실은 또 다른 비극적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찮게 여겨졌던 종이 그림이 다른 문화권에 영감을 주고, 그 배경에 또 다른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3만 명의 조선 도공들과, 그들이 일본에서 완성시킨 세계적인 아리타 도자기를 연관 지어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아시아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던 아픔까지 상기시킨다.


도자기 전쟁: 조선의 한계와 일본의 부상

특히 임진왜란의 도자기 전쟁은 조선 도공들에게 있어 신분적 탈출의 가능성을 품은, 역설적이게도 글로벌 생존의 전쟁이기도 했다. 당시 천민 계급이었던 조선 도공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사쓰마 도자기 등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세계적인 도자기 산업을 구축하게 된다. 일본은 유럽 귀족들에게 도자기를 수출하며 하이테크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고, 그 자본으로 해군력을 강화하여 이후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한다.

반면, 조선은 이러한 도자기의 산업적, 경제적 가치를 지배 권력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한계를 가졌다. 일상의 막사발조차 일본의 와비사비(わびさび) 미학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어 자기화되었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그 본질적인 가치와 산업적 가능성을 스스로 온전히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인식 체계와 직결된 비극이었다.


조선의 대기근: 기후 위기와 무능한 국가 시스템

조선의 대기근은 모네의 개인적 가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의 기후적 대응 한계와 사회 구조적 취약성을 극명히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었다. 17세기 말에 있었던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이어진 병정대기근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후 변화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상황이 겹쳐 발생한 대참사였다. 농경지가 황폐화되고, 극심한 한파로 인해 농작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 해가 지속되었다. 이는 수많은 민중의 아사(餓死)를 불러왔으며,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도적이 되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를 강행해야 했다.

경신대기근(1670~1671)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극심한 가뭄과 연이은 냉해가 조선 전역을 휩쓸었고, 이로 인해 두 해 동안 농사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경신대기근으로 수십만 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당시 정부의 구호책은 부족하거나 비효율적이었고, 민중들은 산에서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심지어 아사한 가족의 시체를 버리지 못하고 이를 먹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구마: 놓쳐버린 생존의 기회

소빙하기로 인한 기후 변화와 농업 생산력의 부족은 민중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고구마와 같은 작물의 도입은 이러한 대기근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잠재적 해결책이 될 수 있었지만, 전국적인 재배와 활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렸다. 16세기 후반 일본이 도자기 산업으로 유럽의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과 군사력을 강화할 때, 조선은 고구마 하나를 전국적으로 재배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광려가 중국의 고구마를 도입하려 했고, 그의 노력은 동래부사 강필리와 조선통신사 조엄으로 이어졌으나, 실제 전국적 보급은 190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의 농민들은 가렴주구의 절정 속에서 새로운 작물 재배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으며, 국가라는 울타리는 민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가난의 스펙트럼: 창조적 고통, 변혁의 기회, 절멸의 위협

모네의 그림에서 시작된 나의 사유는 '가난'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는지 깨닫게 했다.

클로드 모네의 가난은 예술가로서의 삶에서 비롯된 '창조적 고통'에 가까웠다. 그의 궁핍은 외부의 강압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마주한 현실이었고, 오히려 아내와 아들을 모델 삼아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작품에 담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고통은 그의 예술을 더욱 진솔하게 만들고 깊이를 더하는 동력이 되었다.

반면, 조선 도공들의 가난은 단순한 궁핍을 넘어 '생존을 위한 변혁의 기회'를 의미했다. 조선에서는 천대받는 신분이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비극 속에서 강제로 끌려간 일본에서 그들의 기술은 재평가받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도공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우며 자신과 후손의 생존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조선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경제적 변혁의 기회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조선 민중을 덮친 대기근의 가난은 국가의 시스템 부재로 인한 '절멸의 위협' 그 자체였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시적인 재난 앞에서, 국가는 민중을 보호하지 못했고, 새로운 해결책(고구마 도입)을 적시에 수용하고 보급하는 데 실패했다. 이 가난은 인간의 존엄마저 위협하는 비극이었으며,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하는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졌다.

결국, 모네의 그림에서 시작된 연상은 개인의 작은 가난의 본질과 가난의 역사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지극한 가난 속에서도 예술을 창조해낸 화가들과, 때로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도공들, 그리고 기후와 사회적 억압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생존을 모색했던 민중들의 역사는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그 연관성을 찾아내고 확장하는 작업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가진 위대한 힘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모든 실타래를 엮어낼 이야기 하나를 상상한다. 조선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아이, 조선에 남아 스님이 된 아이, 마카오로 팔려간 여자, 그리고 결국 도공의 길을 가지 못하고 다른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던 남자의 이야기. 이들의 삶을 통해 가난과 시대의 폭력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인간의 저항과 자존, 그리고 잃어버린 가치를 되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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