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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비근대 형상: 풍부한 타자지대로의 초대

글 백용성 (미학자)

by 신지승

마을의 비근대 형상: 풍부한 타자지대로의 초대- 백용성(미학자)

우리의 모든 유럽문화는 오랜 것으로 이미 10년 또 10년 마다 더해 가는 긴장의 고문으로 인하여 하나의 파국을 향하기라도 하듯 움직이고 있다. 불안하고 난폭하게, 허둥대면서, 마치 그것은, 종말을 의욕하면서, 더는 그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는, 그 자신을 뒤돌아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분류(storm)과 흡사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의 실험�

1 바깥의 사유 터, 마을.

마을은 묘한 뉘앙스로 가득 찬 장소이자 터, 우주이다.

거기엔 특이한 ‘사이 공간’들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코라면 혼종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것이다.

마을은 외견상의 평화로움과 달리 여러 상이하고 이질적인 정서, 경험, 역사, 이야기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강원도 원통마을의 한 할머니 이야기는,

신지승 감독이 말하듯 파지를 모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의 삶을 노래하는 다음의 정서와도 조응한다.

“삶이 얼마나 무거워져야 가벼워지는지 모르는/

허리 굽은 이가 저울 위에 그의 전부를 올려 놓는다/

먼저 무게를 다 달고 난 이가 멀찍이서/

그, 저울눈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견줘보고는 배식배식 웃는다/햇빛 환한 마당에는 좀 더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삶이 순해진다.”(

설정환, 「삶의 무게」 중)


훔쳐보는 눈짓, 배식배식 웃는 것, 햇빛 환한 마당, 가벼움 –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에 박혀 있는 부분대상 혹은 예술적 조각들이다.

이것이 시퀀스로 몽타주로 영화화되는 걸 상상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마을에서 직접 해보는 것. - 하나의 모험임에 틀림없다.


마을영화는 외롭고 상처받은, 자존감 필요로 하는 이들과 노래하며 추는 춤이다.”

일종의 치유과정과 같이 간다.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건강함이다. 브나로드 운동과는 다르다. 어쨌든 마을은 이제 당연한 장소가 아닌 새롭게 보아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의 실험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근대화를 거치며 마을을 다르게 생각해왔다. 도시민들에게 농촌마을은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아직도 가부장제가 지배적인 촌구석. 혹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사람 좋은 농부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 그러나 이 모두는 일종의 허구일 뿐이다. 근대화, 도시화는 마을의 형상을 점차 사회의 어둠 속으로 잠기게 했다. 그나마 일상에 동행했던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가 종영된 지 14년째다.(1980~2002) 사실은 도시화보다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직접적으로 ‘마을 형상’을 지우고 탄압한 샘이다. 각 마을의 전통문화를 미신타파라는 미명하에 없애고, 지붕개량, 신작로 건설 등을 빌미로 동네를 위생적 지대로 만들고자 했다. (일제시대 ‘농촌진흥운동’을 통한 농촌마을의 제어, 통제의 노력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어 서울로의 도시집중화(<난쏘공>)를 거치며 농촌마을은 점점 더 주변화 되거나 클리셰로 변한다. 농촌마을의 고령화는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모두가 떠나는 것이다. 그 어떤 ‘가치’도 찾기 힘든 촌구석이라는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마을이 담론의 중심, 정책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마을 만들기, 지역재생, 마을 미술 프로젝트 ….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문광부의 2009년 마을미술프로젝트 시작; 예술가들의 일자리창출을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 토건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 도시재생활성화(2013. 국토부) 정책적 차원에서의 ‘참여’ 폭의 확대와 지역의 확대는 필요하다. 또한 그에 대한 지원도 당연하다. 그러나 예술적 입장에서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단순한 수주, 납품의 형태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왕왕 벌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미 구축된 시민참여라는 패러다임에 갇히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술가들은 업자가 되거나 그 직원으로 전락한다. 그걸 박차고 항상 예술이 맞닥뜨리는 문제, 어떻게 미지의 예술형상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 할 것인가? 어떻게 숨겨진 힘들의 선들을 묶어 예술에 결정화시킬 것인가? 마을에는 어떤 보이지 않은 형상, 힘들, 감응, 이미지, 역사, 숨결들의 웅크려 있는가? … 문제는 솔루션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제기하는 것이다. 다시, 새롭게, 의욕적으로, 저항하면서, 유희하면서 문제를, 이 문제, 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마을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도 공동체가 아니다. 마을은 돼지의 마을이다. 신들의 마을이다. 개구리들이 도약하는 시간에만 마을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생성의 시간에 자리할 것. 여기서 모든 행위들은 예술적인 것이 된다.

2 타인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타자이론

신 지승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마을영화는 바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개개인의 이름과 얼굴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드라마다.”

약간 덧붙이면 그 공동체는 오고 있는 공동체이며, 영화작업과 함께 탄생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마을 형상은 타자 지대이지 동질감과 연대감이 넘치는 게마인 샤프트, 공동사회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게젤샤프트도 아니다.(퇴니스)

물론 기계적 연대도, 유기적 연대도 아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마을에 대한 ‘허상’이다.

진상은 오히려 ‘마을은 하나의 타자’라는 것이다.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타인으로 다가온다.

그 이름, 얼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타인이란 이러저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타인이다.


즉 타인이란 여기서 가능세계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얼굴, 혹은 하나의 표정과 그를 언술하는 언어와 분리불가능하다.

하나의 얼굴, 이름, 풍경 들이 타자지대를 형성한다.

이에 대해선 사회심리학적인 여러 결과들만이 아니라 타자를 마주함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


들뢰즈에 의하면 타인은 내가 지각하는 대상이나 나를 지각하는 어떤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각장의 구조이며 실제적으로 감각하는 세계의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러한 선험적인 타인을 타인-구조라고 정의한다.


즉 선험적인 타인-구조가 있기 때문에 여러 주체들이 가능한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것. 이는 마치 4인칭 단수라는 시점과 같다. 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를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각장 내의 가능한 세계를 표현하는 타인 개념의 경우,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지각장의 구성요소들을 그 자체만으로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타인이란 더 이상 장의 주체도, 장 내의 어떤 객체도 아닌 하나의 조건이 될 것이며, 바로 그 조건하에서 단지 객체와 주체뿐만 아니라 형상과 배경, 주변과 중심,



동적인 것과 지표, 타동적인 것과 실체적인 것, 길이와 깊이가 재분배될 것이다. 타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 지각되지만, 개념에 있어서의 타인이란 우리들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지각의 조건이 된다. 바로 그러한 조건하에서 우리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한다. 타인은 세계를 통과시키며, 따라서 ‘나’는 이제 거쳐 온 세계만을 지시할 뿐이다.(“나는 평온했었다.”)”

칸트적 의미에서의 가능적인 것은 유사성의 세계였다. 그것은 회고의 논리였으며 재현의 논리였다. 그러나 여기서 가능적인 것은 재현이하의 수준, 혹은 전개체적인 것의 수준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먼저 �차이와 반복�에서 지적하는 가능세계를 따라가 보자.


(중략)




현실의 마을은 수많은 많은 타자성들이 알알이 박혀있는 알려지지 않는 대지이기도 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대지는 너무도 커서 마치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거대한 뿌리라고 강조한 그 세계는 고작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일 뿐이다.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전근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한낮 타자지대에 머무는 한물 간 것이거나, 구석에 박혀있는 것이지만, 거기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도처에 주름 잡힌 세계(universe or pluriverse)이며, 단순한 문자적, 언어적 재현 세계를 벗어나면서 동시에 전-언어적인 세계이다. 그러니 여기가 좋은 의미의 아시아 및 아시아 예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각 지역의 숨겨진 대지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세계는 벤야민이 <얘기꾼과 소설가>에서 지적한 대로 “새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는 정보의 세계와 완전히 대립되는 이야기의 세계이며, 그 세계를 떠받치는 잠재적 공동세계, 이질적인 타자지대의 아우토 포이에시스인 자기생산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스스로를 완전 소모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자신이 지닌 힘을 집중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자신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은 예술일반에 속하기도 하는 문제이지만, 한국의 예술과 관련해 말하자면 그 새로운 방향과도 밀접히 관련된 능력이기도 하다. 그것이 펼치는 세계는 라투르의 말을 빌자면 전근대의 세계도, 근대의 세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탈근대의 세계도 아닌 비-근대의 알려지지 않은 세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을에서의 예술프로젝트는 서구적(혹은 근대적) 문자 재현 체계와 이상적인 고정적 시점을 전제로 하는 서구 관점주의(혹은 원근법주의)를 문제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며, 동시에 그것이 조성할 수 있는 비-언어적 질료를 통한 시적 분위기와 뉘앙스, 구현된 타자성의 세계, 상대화된 동적 관점주의의 실험은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과제가 수행되면서 마을은 혹은 마을의 아트 스페이스는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 이런 저런 도시, 행성, 대륙, 우주. 어떤 지도 위에도 어떤 하늘 속에도 그 흔적을 복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것들이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도시, 이 대륙, 이 행성들은 흔히 말하듯 사람들 머릿속에서, 아니 그들 말의 틈에서, 그들 이야기의 밀도에서, 아니면 그들 꿈의 장소 없는 장소에서, 그들 가슴의 빈 곳에서 태어났으리라. 한 마디로 감미로운 유토피아들.”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선언을 들어보자.


이동극장 NO.2.

시가지와 부유한 동네와 가난한 동네와 작은 마을들,

전 세계를 운전하며 다녀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파블로 피카소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라.


모토!

움직이는 극장!

살아있는 음악!!!

플럭서스와 평화를!!!

깨어나라,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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