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원효뿐이겠는가? 2016년 80분 극
2016년 여름은 무척이나 무더웠다. 그 여름을 가족은 한 달 넘게 한강 원효대교 아래에서 지냈다
간혹 대교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하루하루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온전한 세끼와 편안한 잠자리는 영화를 만들어 가는 동안 나뿐 아니라 6살 아들과 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 하륵 하늬는 처음으로 아침에 라면을 먹었다. 아이들이 간혹 라면을 찾을 때마다 그때 한강의 아침 문화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하는 죄의식을 매번 느껴야 했다
한강의 밤은 서울의 인공열이 차가운 강으로 몰려와 엄청난 습기를 만들어 냈다.
매일 발전기를 틀고 장비를 설치하고, 아침 겸 점심을 늦게 먹은 후 뜨거운 낮 3시부터 6~7시간 촬영을 진행했다. 이후에는 또 두 시간을 들여 장비를 정리해야 했다.
촬영 모니터와 잠자리 역할을 했던 5톤 트럭은 창고역할 외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처음에는 시원한 강가에서 가족들과 캠핑을 하며 그날그날 촬영한 영상을 가편집해 벽돌을 쌓듯 작업할 생각이었다. 힘들겠지만 여유롭고 낭만적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정리되는 밤 11시가 되면 이미 아이들과 아내는 강가에서 지쳐 노숙하고 있었다. 전기가 지원되지 않아 밤에는 편집을 진행할 수 없었고, 낮에 촬영한 것을 머릿속으로만 편집을 해야 했다.
15일간의 촬영과 3일간의 편집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나에게 150여 명이 넘는 시민들과 사우디, 네팔, 방글라데시, 중국교포 등과 함께 빚어낸 훌륭한 조각보 같은 작업이었다. 대중 창작과 공동 창작이라는 개념이 내 머릿속에서 한층 진화되었다.
카이스트에서의 5개월 레지던스 작업이 학업에 바쁜 학생들과의 공동 작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늦게 깨닫고 한 달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한강 원효대교로 도망치듯 와 시작한 작업이었다
한강에서의 작업은 보름간의 극적인 이야기만 남겼다. 고행이란 간혹 누군가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중에서도 단 한 사람은 우리 가족에게 잊히지 않을 추억을 안겼다
원효대교 아래에서 만난 '한강 아저씨'
폭염 속에서, 원효대교 아래서, 나는 '원효의 시간'을 경험했다.
우리 가족은 그를 '한강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왕십리에 살며 어릴 적부터 한강 백사장을 찾아다녔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정한 곳도 한강 다리 아래였다.
사람들은 그를 노숙자라고 불렀지만, 우리 가족은 굳이 차별적이고 편견 가득한 이름으로 그를 부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쓰레기통 근처에서 우유를 마신 건 처음이었다. 그의 행색이 아닌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는 충분히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지켜보니 당신 참 열심히 사는 것 같네요."
그가 처음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네요."
"원래 저 63 빌딩에 올라가 있는 이들은, 발 빠른 이들이 많지요. 다는 아니라도."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카메라는 그에게 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의 그림자만 찍기로 약속했다.
“그림자만 찍을게요 .절대 얼굴은 찍지 않을 겁니다. 하루 한 시간 수고료?로 만원 드릴게요.” 돈이 없었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알량하고 수치스런 제안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그는 내가 건네는 염치없는 수준의 수고료를 거절하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한강에서 주워 모은 포장을 뜯지 않은 과자, 심지어 용돈까지 쥐어주었다
주워 모은 한 가득한 스타킹은 아내에게 건넸다.
그렇게 친해진 우리는 그가 한강에서 모은 깡통을 차로 옮겨주고 그가 사람들이 눈을 피해 몰래 자는 노들섬 한켠을 오고 갔다.
어느 날 그가 아이들에게 연을 건넸다. 한강을 찾은 이들이 놀다가 버리고 간 온전한 연을 주워
보관하고 있었던 연이었다.
처음으로 아이들은 연을 만났고 연과 바람을 배웠을 것이다.
그가 건넨 하륵의 연이 한강 원효대교 기둥 높은 곳에 걸려버렸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걸려 있었다. 누구도 그 연을 제거하지 못할, 아득한 높이였기 때문에
몇 달을 그 기둥에 걸려 있었다.
그가 건넨 연과 물레 그리고 하륵은 그때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을까?
시설을 거부하고 자유를 택하면서 삶의 의미를 항상 스스로에게 묻는 한 노숙자
가족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한 남자와
가족들과 함께 추억을 남기기 위해 떠돌이 트럭 가족을 찾아오고 가던
사람들이 있었지.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20대인 자신의 어린 남매들이 언젠가 그곳을 한 번쯤은 찾아올 것이리는 기대로.
“나의 유년시절이 이 한강과 같이
중학교 때 올라와서 모래사장에서 놀고,
왕십리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한강백사장을 찾아다녔어요"
그래서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정한 곳이 이 한강 다리 원효대교 밑이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극장에서 아이스게끼
매점에서 브라보 있어요 오징어 땅콩 있어요
충무로 가면 영화사가 있거든 배우들 볼 사람 다 봤어요”
그는 오래전 극장 간판을 그렸었다.
컴퓨터 실사시대가 되자 그에게는 일이 사라지고 병이 찾아왔다.
극장에 걸리지도 않을 영화를 만들고 있는 나와 그렇게 한강다리에서 만나는 건 오묘하고 귀한 인연이었다.
늦은 밤에야 우리는 촬영을 끝내고 아이들은 텐트에서 자기도 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비둘기의 아침 식사를 찍는다
그의 비틀거리는 다리를 찍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찍었다.
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기존의 영화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단지 관객화, 수동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해 새로운 화엄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입니다. ”
난 숨은 연기자를 찾는 작업이 아닌 살아있는 삶의 노래와 춤같은 연기를 찾고 싶은 것이다
지금 연기라는 것은.... 죽은 , 인공조미료 가득한 직업적인 가식일 뿐이다.
어떤 연기가 살아있는 것인가?
삶의 땀과 아픔, 상처가 묻은 이야기를 가진 얼굴들을 보고 싶다. 그런 얼굴을 만나기 너무 힘들어
결국 나는 그를 통해 내 영화적 판타지를 이루어 낸 지 모르겠다
서울 시민 161명이 참여하고 그 한강 아저씨가 출연한 영화 ‘어찌 원효뿐이겠는가?’ 라는 제목으로
2016년 8월 19일 7시 , 20일은 여의나루역 3번 출구 강변에서 상영했고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길 위의 빛들’이라는 작품으로 공개되었지만 그는 초청되지 않았다.. 초청할 수 없었다.그와의 연락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도 그런 자리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며 불교를 대중적으로 실천하기를 원했던 원효를 다시 보게 했다
춤과 노래를 부르고 살아야 하는 간절한 이는 누구이던가
누가 과연 춤과 노래를 부르고 살아왔던가?
2017년 매서운 추위의 겨울, 휴전선 10km 전방 마을의 어느 주차장에서 살아갈 때 항상 우리의 염불은 '한강아저씨를 생각하자'였다.
그는 우리가 버틸 기준을 이미 1년 전에 제시해 주었고 우리는 그를 만난 덕분에 거뜬히 당시 영하 18도의 추위와 가난을 트럭안에서 버텨낼 어떤 힘을 이미 배웠는지 모른다
한강과 노들섬을 떠올리면 한 명의 철학자가 그리워진다.
노들섬 강변 계단 아래가 그의 잠자리였다.
여름에는 거미줄을 모기장 삼고 겨울에는 모기장을 보일러 삼아 자는
그런데 예술섬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가 숨어 살았던 계단밑 천혜의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
몇 차례 노들섬으로 그를 찾아갔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아빠! 한강아저씨는 지금 어디 있을까? ”
“노량진에서 껌을 팔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아니면 잠시 타협해서 그토록 싫어하던 쉼터로 찾아갔을 수도 있을 거야
세상에 그늘, 구석, 변방이 없이 환해지는 게 간혹 누군가에게는 잔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
다음날 아침부터 고성 바다에서 한강의 연을 날리고 있었던 우리는 속초로 향했다.
나의 작업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드라마였다. 물론 드라마는 픽션이다. 가짜인 것이다.
한 달 동안 나는 가짜를 만들었고, 진짜는 영화가 아닌 기억으로 남았다.
영화의 끝,
200여 명의 시민들—10대부터 80대까지—그들의 극참여로 함께 만든 영화.
"19일 저녁 7시~10시, '한강에서 원효를 만나다'라는 콘셉트의 영화가 원효대교 아래에서 상영되었다.
제목은 "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고 싶은 이가 어찌 원효뿐이겠는가?"였지만 줄여서 " 어찌 원효뿐이겠는가 "로 했다.
한강 아저씨의 20년간의 기억을 담은 내레이션을 이 영화의 맨 처음에 넣었다.
영화의 시작으로 삼아 어쩌면 전개될 맥락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고 싶었다 .
오직 내 혼자의 이어짐만 염두에 두고 .
겨울이 오면 그는 원효대교 아래에서 노들섬으로 들어갔다. 그는 노들섬을 지키는 철학자였고, 스스로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존의 소유자였다. 서울에 가면 항상 그를 찾아가는 것이 내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었다.
차가운 한강변옆에 있는 여름 그물텐트 안에서 그가 반겼다 오리털 잠바를 입고 모자를 덮어쓴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로 그의 옷차림은 내가 여름 방 안에서 입던 수준정도였다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그건 나약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죽비 같은 것이었다..
그 후
2018년, 노들섬 공사로 텅 빈 그의 집터를 보고 난 후로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노숙자였지만 나를 가르치는 힘과 우리 가족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추억을 남긴 이였다.
3년 뒤 이 작품에서는 넣지 았았던 한강아저씨의 이야기를 "길 위의 빛들"이라는 로드무비에 넣어 작품을 만들었다. "길 위의 빛들"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초청상영되었고 제1회 부산국제 동물영화제 베스트필름상을 수상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