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생

금강산 가는 길 2019년 다큐 60분

by 신지승


34년생


강원도 인제군 천도리 지방도로변, 군인관사로 지어졌던 오래된 집


그곳에는


일제강점기 하루코로 불렸던 ,


해방과 전쟁을 겪고 엄마 찾아 들어온 천도리. 이곳에서 68년을 살았다.


굴곡진 인생사를 들어도 들어도 삼국지보다 재미나는 한 여인의 인생사였다


주문진 소돌마을에서 태어났다


3살 때 포락이 닥쳤다. 포락이란 '논밭이 강물이나 냇물에 씻겨 무너져 떨어지는 것'을 일컫었다


바닷가로 떠내려 온 소나무에 사람이 붙어 죽어있었는데 아무리 떼려 해도


떼어지지 않았더란다 죽어서도 손을 놓지 않았던 그 간절한 생존의 욕망.


3살 때에 본 생존의 욕망을 무참히 배신한 자연의 힘. 그 모습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3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만 3살 기억이 85살 의 지금까지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가지 못했다.




연곡에 주막이 있는데 옆에 사람이 빨리 가자고 일으켰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린 포탄이 보따리 짊어지고 다리를 건너가던 사람들을 덮쳤다


말라리아가 나를 살렸다 이런 걸 새옹지마라 하는가


옥천 국민학교에서 피란민에게 주먹밥 하나씩을 배급했다


누군가가 하루꼬를 불렀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며 특별히 주먹밥 두 개를 안겼다


주먹밥 두 개는 무척 뿌듯했다




전쟁 중 서울로 가려고 원통으로 왔는데 고향 사람이 울 엄마를 서화리에서 봤다고 해서 당장 천도리로 찾으러 들어왔다


당시 군인 관사로 지은 집 지서장 허만복 아직도 그 이름 선명하다.

.


16살 때 결혼을 하고 딸아이 100일 때 총 메고 휴가 왔던 남편.


딸아이를 안고 나갔다가 혼자 들어오는 남편


놀라서 애는 어디다 두고 왔냐니깐


창피해서 마을 친구집에 놓고 왔다더라


그 길로 고성으로 간 남편은 고성전투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고성전투에서 남편이 죽고



천도리 방첩대가 있었던 자리 내금강 가는 길 뒤에 알고 보니 68년 남편 시동생이 이 앞에 근무하다 김신조 사건 때 산에 있던 군인들에게 도시락 가져다주다가 죽었다


죽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바로 코앞에 저 집 우리 시동생이 살다가 방첩대가 있었던 자리


22살 미제장사 서울로 가서 물건 떼다가 천도리로 와서 장사했다. 치즈 양담배


쌀장사


전쟁으로 인해 면사무소안의 호적이 불탔다 남편과의 결혼 딸의 흔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남편과 같은 강 씨 성을 따 호적에 올렸다



배사람들이 보급소에서 나온 군복을 염색해서 입었다


그것으로 돈벌이도 했다


그래도 85살인데도

흔한 관절 수술도 받지도 않았고 작은 글씨도 돋보기 없이 보는 게 조상에 감사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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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레바리 와 비득고개의 추억’

북한 원산, 기차소리 들리는 철길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전쟁이 나기 전, 그해 집에서 인민학교를 다니는 길에 만난 소련 군인들에게 받아먹었던

길쭉한 러시아 빵 ‘흘레바리’의 맛은 아직도 입속에서 맴돈다.

어머니의 주먹밥과 1학년 첫 운동회, 전쟁으로 인해 북쪽 학교의 추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숨어 지냈던 원산의 갈마에서 부모님은 7살 막내인 자신만 데리고 교전하는 총소리를 들으며 밤중에 함흥으로 갔다.

남의 집 소외양간에서 배를 탈 궁리만 하면서 이틀을 지냈다.

아버지 등에 업혀 높이 30미터 , 폭 50cm 정도의 긴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간 거대한 배는 가족에게는 ‘노아의 방주’나 다름없었다.

‘빅토리호 ’ 위에서 아버지는 남쪽 가면 쓰지도 못할 거라면서 북한 돈을 바다에 마구 뿌렸다.

그리고 거제도로, 다시 부산으로 갔다. 이불 하나 없었던 가족은 처음 몇 달은 영도다리 근처에서 동냥을 하며

버텼다. 그 뒤로는 어머니가 옷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포항(5달) 속초(1년)를 거쳐 원통으로 , 54년 천도리로 들어왔다.

인제중학교로 오가는 버스를 놓치면 무작정 올라탔던 군인 트럭이 비득고개를 넘을 때 보이는 천도리마을.

여기서 7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될지 , 자식들의 고향이 될지는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딸 손주 셋을 보고도 아들손주 보는 게 소원이었던 어머니. 결국 아들손주가 태어난 그해, 내 나이 마흔한 살에 어렵게 낳은 아들을 보지도 못하고 떠나셨다.

철물가게를 하면서 때 마침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돈도 벌었고 그 덕에

자식들을 모두 춘천에서 공부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이던 아버지는 손수 성당을 지어 지금 천도리공소로 남아 있다.

마흔 나이에 디스크를 앓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1년을 누워만 살았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서 이곳저곳에 돌탑을 쌓기 시작해 10년 동안 19개의 돌탑을 쌓았다.

오래전에는 천도리에 북한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남북간에 평화가 오고 고향 원산 땅을 밟아 볼 기회가 오면 좋겠다.

쌓아 놓은 돌탑은 ‘흘레바리’와 ‘비득고개’의 시간을 맞들어가는,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추억과 기억들을 나름대로 쌓아가는 일이다.

마을의 행사에서 노랫소리가 울리면 매번 앞에서 막춤을 추는 자신을

사람들은 안 끼는 데가 없는 , 가만있지 못하는 흥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거슬러 가보면 서화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를 시작하면서 어울린 추억, 여기서 아내를 만나고 자식을 키운 천도리에서의 더없이 행복했던 기억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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