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작가의 소설 '아가씨 유정도 하지 '는 늙어 간다는 것에 대한 색다른 형식의 찬사이자 안타까움이다. 물과 기름이 엉키듯, 뭔가를 애써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힘들게 보이기까지 한다. 너무 고도의 구조화로 인해서다.
고령화, 노인의 경제적 양극화, 노인 우울증,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 땅에서, 나름 무애한 짧은 자유를 누리는 82살 노인의 뉴욕여행기는 유쾌하지만 않다.
하지만 늙음이나 청춘이나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은 이미 철저히 계급화돼 있기에, 경우에 따라선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뭐, 한 명쯤은 그렇게 며칠 살 수 있는 노인이 있는 거지, 뭐.
의존성, 외로움, 사회적 고립, 자식과의 단절감, ‘어르신’으로 통칭되며 자기 이름마저 문화적으로 사라진 시대를 살며, ‘누구는 그 누구의 서사와 다르다’고 항변하는 일이, 어쩌면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어린아이의 본능적 치기처럼 읽히기도 했다.
나에게 늙음은 무엇인가. 죽음과 가까워지는 시간은 어떤 공포일까? 그리고 삶이란 정말 ‘죽음의 예행연습’ 일뿐인가, 아니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을 찾아야 하는 여행인가. 소설 '아가씨 유정도 하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제목부터 '울산 아가씨'의 가사중 하나이면서 무정과 대립되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캐릭터이면서 이름으로서 중의적 의미를 간직한 언어적 기교가 엿보이듯, 나에겐 단순하지 않다.
'그 누구의 서사와 다른' 상식적인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늙음이라는 보편성에서 무력함을 고요하게 견디고, 무엇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스스로 되새기며 애써 만족하려는 세대가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다는 징후이자 선언처럼 읽힌다.
연애에 있어서도 ‘희생자’로 살기보다는 과감하게 '개새끼 '라고 상대를 공격하는 선택을 하려는, 이제 늙음의 경계에 선 50대 아들. 그는 부양과 동행의 부담과 짜증을 드러내기보다는, 어머니가 ‘재즈와 올드팝에 맞추어 춤추기로 자신을 치장한다.
1955년의 오래된 첫사랑의 편지를 검은 수첩에 넣고 아들과 뉴욕으로 동행한 82살 할머니.
뉴욕과 어울리는 독립적인 노년의 스타일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유독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했던 아버지의 추억이 떠오르며, 여전히 장유유서의 봉건적 질서, 가부장제의 서열 의식에 찌든 한국 사회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싶었던, 민감하고 자존심 강한 젊은 여자의 보편역사가 숨어 있었다.
이제서야, 첫사랑이 있었던 젊은 날의 유토피아를 보고 싶었던 걸까? (이 소설에서 뉴욕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한국의 봉건적 공간과의 이질적 부조화가 핵심)
‘시들어가는 꽃 한 송이’로 상징화된 82살 할머니의 삶.
‘한국’, ‘민족’, ‘가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과감히 벗어나 ‘전 세계 작가 중의 한 명’처럼 독자적이고 글로벌한 유아독존의 개인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가 봉건적 문화에서 탈출한 결과이듯, 끊임없이 전통과 과거로부터 탈출해 도착한 곳이 겨우 ‘뉴욕’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그것이 개인적으론 그다지 멋진 꿈처럼 보이지 않게 만든다.
게다가 아기를 포대기에 안고서 ‘재즈와 올드팝’에 맞추어 ‘울산 아가씨’를 노래하고 춤추는 상상은, 50년대 미군문화와 로컬문화가 혼재된 시대의 상상을 벗어나지 못한 빈곤한 수준으로 이해된다.
할머니는 할머니다. 늙음은 늙음이다. 진시황적인 불로의 삶과, 홀로만의 낭만의 삶을 추구하는 할머니.
독립적인 성격, 냉정, 운전, 컴퓨터, 시니어 요가, 이메일, 노인 불교대학, 직설, 자식에게 상처 주는 말, 미국 문화, 지주의 딸, 타인에 대한 기대가 적어 너그러울 수 있었던 혼자된 82세 할머니.
탈의실이 없던 시절, 창의적으로 적응해 낼 줄 알았고, 자식 가방을 사줄 돈으로 자신의 원피스를 사버린 엄마.
왜 이렇게 불편하고 짜증까지 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의존적이고, 자식 외에는 아무 이야깃거리도 없는 할머니들에게 너그러울 자신도 없다.
가능하다면, 그 양쪽 모두를 거부하고 싶다. 치매나 요양병원, 요양원의 운명과 만나지 않고, 스스로 건강할 때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너무나 절망스럽고 빈곤한 상상력은 그렇게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아이의 숙명 같은 게 있고, 늙음의 숙명 같은 것도 있다.
적절히 고독해야 하고, 적절히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스스로 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소설 속 할머니가 탈출하고자 했던 ‘반말 찍찍’하던 봉건적, 경제적, 문화적, 성별, 신분적 사회 안에 견고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원치 않는다. 죽음처럼, 누구나 원치 않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처럼.
나이가 든다는 건 형벌이다. 애써 찬사 하려 하고 애써 절제하려 하고 애써 인문학적으로 포장하려 하는 문화다.
‘내가 할머니지만, 그 사람들이 아는 할머니는 아니야’라고 버텨보지만,
'사람은 현재에 살아야 한다'… 하면서도, '더 오래된 기억을 기대하고' 마는 이 소설의 혼란스러운, 정답 없는 늙음이 그저 안타깝다. 소설속 82살 할머니로는 봉건의 탈출을 리더 할 수도 , 늙음의 질곡을 보편적 화두로 삼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소설에서는 영화 <블루크린>이나 <000> 같은 작품이 언급되지만, 나로선 《더 파더 The Father》(2020, 플로리안 젤러)나 《네브래스카 Nebraska》(2013, 알렉산더 페인)처럼 늙은 아버지와 자식과의 동행을 다룬 보편 리얼리티한 영화들을 더 떠올리게 된다.
올해 부산국제마을영화제에서 참여형 작품으로 다룰 주제의 하나로 '늙음'을 설정하려고 한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 한국문학을 만나다 강의 노트